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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10월 10일 끊어내야 할 때 과감히 끊어낸 진주대첩 리더십[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

입력 | 2024-10-09 23:00:00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켜낸 김시민 장군의 동상. 동아일보DB


이문영 역사작가

임진왜란은 예상할 수 없었던 재앙 같은 전쟁이었다. 일본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나라 간에 원한이 쌓인 것도 없는데 15만 대군의 침입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일본은 참혹한 학살을 자행하며 조선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불어넣었다. 경상도 지방의 백성들은 산속으로 피신해 목숨을 부지했다. 백성들이 사라지자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군사를 징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바다에서 승전보가 올라왔다. 이순신이 이끈 수군이 적의 서해 진입 시도를 격파했다. 이로써 일본군의 보급이 난망해졌다. 부산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보급선도 의병들의 봉기로 위험해졌다. 일본군은 새로운 루트도 개발해야 했고 곡창 지대를 노리기 위해서라도 전라도 지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길목에 진주성이 있었다.

진주 목사 이경은 성을 버리고 지리산에 숨어 있다가 병사했다. 이에 진주 판관이었던 김시민이 경상우도관찰사 김성일의 명으로 진주 목사를 맡게 됐다. 김시민은 북방에서 여진족과 싸웠으며, 임진왜란 발발 후에는 의병장 김면과 함께 거창을 지키며 격전을 치렀다.

김성일은 통신사로 일본을 정탐하러 갔다가 전쟁이 없을 것이라 주장했던 남인이다. 하지만 전쟁 발발 후에는 경상도 초유사로 의병과 관군 사이를 조율하면서 일본군을 격퇴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는 각처의 의병들을 진주성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김시민이 백성들을 모으고 의병장들이 속속 합류했지만 진주성을 지킬 병력은 3800여 명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진주성 공략을 위해 출정한 일본군은 2만여 명이었다. 한 명의 병력이 아쉬운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김시민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유숭인이 10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진주성에 도착했을 때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병마절도사는 종2품이고 목사는 정3품이다. 상급 지휘관이 들어와 방어전에 혼선을 빚으면 우왕좌왕하다 성이 함락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유숭인은 김시민의 뜻을 받아들였다. 유숭인은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을 만나 격전 끝에 전멸하고 말았다. 김시민이 피눈물을 흘리며 이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김시민이 유숭인을 성으로 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런 계책으로 성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이니, 진주 사람들의 복이로다”라고 말했다.

진주성은 평지성으로 주변에 보조할 산성도 없고 신축한 동쪽 성벽은 넓고 약해서 결정적인 약점이기도 했다. 진주성을 제대로 방어하기 위해서는 1만여 명의 병사가 필요했다. 이것을 메운 것은 김시민의 기책이었다. 김시민은 온갖 계책을 동원해 적병을 막아냈다. 병사와 백성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일치단결했다. 4000∼5000명쯤 되는 의병들의 외부 지원도 큰 몫을 했다. 곽재우, 정기룡 등 용장들이 산에 포진해 일본군을 포위하듯이 했다. 병력은 적었지만 일본군을 견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렇게 한 끝에 6일간의 격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적을 물리친 김시민은 적병의 탄환에 맞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제갈량은 군의 기강을 잡기 위해 사랑하는 부하 마속의 목을 베었고, 김시민은 아군을 사지로 몰았다. 리더는 독하게 끊을 것을 끊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평화로울 수 있다.



이문영 역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