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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치매 할머니, 금방 잊으니까 매번 새롭게 행복 느껴”[데스크가 만난 사람]

입력 | 2024-10-10 23:18:00

간병 일상 유튜브로 만드는 김영롱 씨
“저 아기 때부터 키워준 할머니, 이젠 ‘93세 아기’가 돼 제가 돌봐요”
환자로만 대했던 4년 간 웃음 잃어가… ‘좌충우돌’ 영상 만들며 활기 되찾아
자존감 높아지자 배변 실수 확 줄어… 치매로 잃는 것보다 간직하는 것 많아




《93세의 할머니는 밤에 화장실에 다녀오며 거실에서 길을 잃곤 한다.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전기세 아끼는 습관은 그대로여서 가족들이 일부러 켜놓은 거실 불을 꺼버리는 탓이다. 어두워도 방을 찾아갈 수 있게 바닥에 형광 테이프를 붙여놨지만 소용없을 때가 많다. 할머니는 보행기를 끌고 가다가 벽에 부딪히거나, 좌식 테이블에 앉으려다가 넘어질 뻔한 적도 있다. 가끔 들려오는 ‘따다다닥’은 할머니가 저녁 먹은 것을 잊고 가스 불을 켜는 소리다. 옆방의 손녀 김영롱 씨(36)는 할머니 소리에 신경 쓰느라 잘 때도 귀는 잠들지 못한다.》

5년 전 치매 중기 진단을 받은 할머니를 돌보며 간병 일상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김영롱 씨.


할머니는 치매 중기 판정을 받은 지 올해로 5년째다. 영롱 씨는 할머니 정신이 맑아지는 오후가 되면 귀에다 대고 힘찬 목소리로 묻는다. 5분 전 일도 잊어버리는 할머니지만 이때만큼은 척척 답한다.

“할머니 이름이 뭐야?” “뭐긴 뭐여. 노병래!”
“할머니 고향이 어디야?”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롱 씨가 기특해하며 볼에 뽀뽀를 하면 할머니는 미소를 머금고 말한다. “지랄허네.”

영롱 씨는 아기 때부터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부모의 이혼을 겪으며 혼란스러울 때도 할머니는 변함없이 손녀 곁을 지켰다. 영롱 씨는 “따뜻한 화로처럼 제 주변을 덥혀주는 존재였다”고 했다. 동네 아이들이 괴롭히기라도 하면 “우리 영롱이 울리는 놈은 망태 할아버지한테 던져버릴 거니께 그런 줄 알어!”라며 혼내줬다고 한다.

전남 영암군의 외갓집에서 자란 영롱 씨가 3세이던 1991년 할머니 노병래 씨의 품에 안겨 있다. 김영롱 씨 제공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영롱 씨는 온라인 의류 쇼핑몰을 하며 바쁘게 지냈다. 그가 갓 30대가 된 2019년 할머니는 치매 진단을 받았다. “그땐 무덤덤했어요. 시한부 판정을 받은 것도 아니고 지금처럼 지내다가 가끔씩 도와주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정도로요. 치매에 너무 무지했죠.”

● 서툰 간병에 표정을 잃어간 4년

처음 몇 달간 할머니 간병은 영롱 씨 어머니의 몫이었다. 하지만 재택근무를 하는 영롱 씨는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목욕처럼 힘쓰는 일을 맡게 됐고, 어느덧 치매 증상이 휩쓸고 간 자리를 수습하는 게 일상이 됐다.

“소변 자국을 닦아내고, 변이 묻은 옷과 이불을 매일같이 빨았어요. 할머니는 계속 잊어버리니까 방금 전 했던 질문을 반복하는데 귀도 안 들리셔서 매번 할머니 방으로 가 귀에다 크게 말해야 했어요. 지칠 땐 할머니 목소리를 백색 소음처럼 여기고 대꾸도 안 했죠. 제가 외출한 날엔 저녁 9시만 돼도 이웃에 다 들리게 ‘영롱이 바람났는가 보다’라고 소리를 지르셔서 일찍 귀가해야 했어요. 감옥에 갇힌 듯했죠.”

할머니는 종일 거실 소파에 앉아 TV 홈쇼핑 채널을 무음으로 해놓고 멍하니 바라봤다. 귀는 안 들리고 자막도 읽지 못하니 그나마 볼 수 있는 건 상품이 계속 바뀌는 홈쇼핑뿐이었다. 영롱 씨는 “할머니가 외딴섬처럼 외로워 보였다”고 했다. 그렇게 4년이 지나며 영롱 씨 가족은 표정을 잃어갔다. ‘기저귀 갈자’, ‘밥 먹자’, ‘씻자’, ‘누워’ 이 네 마디가 대화의 전부였다. 영롱 씨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하고 싶은 것들을 상상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죄책감에 시달렸다.

학창시절의 영롱 씨와 집안 대소사를 도맡아 하셨던 할머니.


하루는 영롱 씨가 기저귀 실수를 한 할머니를 욕실에서 씻기다가 “너무 힘들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평소 영롱 씨가 대소변을 수습할 때 벽만 보고 서 있던 할머니가 이날은 달랐다. 몸을 돌려 비누 거품이 묻은 손으로 손녀의 젖은 눈가를 닦아줬다. “할무이가 미안혀.” 할머니는 이 말을 계속 하며 눈물을 쏟았다.

영롱 씨는 할머니도 미안함을 느낀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고 했다. 미안함은 앞서 일어난 일을 기억할 수 있어야 느끼는 줄 알았는데 손녀가 힘들어서 운다는 것 자체에 미안해하는 듯했다. “전후 상황을 잘 모르더라도 저에 대한 사랑이 기억의 공백을 채워서 그런 감정을 느꼈던 게 아닐까 싶어요.”

● 유튜브 찍으며 발견한 할머니의 진면목

영롱 씨는 이런 할머니를 보며 오랜 계획을 실행해볼 용기를 냈다. 할머니와의 일상을 유튜브로 만들자는 계획이었다. “뭔가에 노력해서 성과를 내면 성취감이 들어야 하는데 간병은 그런 게 없어요. 칭찬을 기대할 수도, 힘든 걸 드러내기도 어려워요. 근데 유튜브 영상을 만들면 할머니와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어 고단함이 덜할 것 같았어요. 무엇보다 저희 가족은 웃음에 너무 목말랐어요.”

영롱 씨는 지난해 초 첫 영상을 올렸다. 할머니는 영상에서 이런 첫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이렇게 오래 살았으니 당신네들도 그냥 살으믄 오래 살아요. 슬프면 슬픈 대로 살고, 좋으믄 좋은 대로 살고, 그냥 돌아오는 대로 살으믄 되는 거여.”

영롱 씨와 서울 성북구의 집 마당에서 햇볕을 쐬는 할머니.


지난 4년간 할머니와 제대로 된 대화를 못 해봤던 영롱 씨는 거침없이 말하는 할머니가 놀라웠다. 기회가 없었을 뿐, 무대가 열리자 속마음을 술술 풀어놨다. 이후 ‘할머니 MBTI 검사’ ‘할머니 레시피로 나박김치 만들기’ ‘회춘 네일 받기’ ‘할머니의 고민상담소’ 같은 영상을 꾸준히 올렸다.

외향적 성격인 할머니는 촬영을 위해 뭔가에 도전해보는 걸 즐겼다. 기억을 잃어가고 있지만 누군가에게 기억될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는 듯했다. 영롱 씨에겐 “테레비 찍고 있냐”고 수시로 물었다. 할머니의 입담도 되살아났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땐 “호사방구(호사스럽게 잘 먹고 나서 뀌는 방귀) 쫙 갈긴다”며 들떠 하고, 영롱 씨가 간병하느라 밤잠을 설치면 “노인네 데리고 살려면 골치 아픈 거여”라며 어깨를 두드려줬다. 할머니는 손녀와 이런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활기를 되찾았다.

“나는 못 배운 게 한이여.”(할머니)
“할머니가 내 딸로 태어나면 잘 교육시켜줄게.”(영롱)
“너는 나이도 많고 신랑도 없어서 이미 글렀다.”(할머니)
“요새는 정자기증을 받아서 혼자서도 낳을 수 있어.”(영롱)
“아빠도 없고 고생이 뻔한 집에서 내가 뭐 하러 태어나.”(할머니)

할머니가 한창 화투를 칠 때 외치곤 했던 “에라이, 못 먹어도 고다”란 표현도 자주 나왔다. 이런 말을 듣고 자란 영롱 씨 역시 치매 간병 유튜브를 누가 재밌어할까 걱정이 됐을 때도 ‘못 먹어도 고’ 정신으로 저질렀다고 한다. 영롱 씨의 채널(롱롱TV)은 1년 반 만에 구독자가 14만 명을 넘어섰다.

할머니는 유튜브 촬영을 위해 딸, 손녀와 함께 손가락에 봉숭아물을 들이며 활짝 웃었다.



―유튜브를 하면서 할머니 증상이 좋아졌나.

“웃는 일이 많아지면서 배변 실수가 많이 줄었다. 의사 선생님도 ‘치매 환자가 자존감이 올라가고,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겨 우울감이 낮아지면 인지 능력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고 하셨다.”

―자꾸 잊어버리는 할머니와 산다는 건 어떤 건가.


“금방 잊기 때문에 즐거운 순간을 매번 새로 경험하게 된다. 잠자기 전 할머니와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는데 할머니는 언제나 보를 내기 때문에 저랑 엄마는 일부러 주먹을 낸다. 할머니로선 늘 처음 이기는 거라 아주 기뻐한다. 구독자가 10만 명이 넘어 유튜브 ‘실버버튼’을 받은 것도 ‘내가 손녀 덕분에 뜨는구먼’ 이러면서 매일 좋아하신다.”

―우리는 아무리 좋은 것에도 쉽게 무뎌지는데….

“불필요한 기억은 날아가고 소중한 기억은 더 고이 간직되는 것 같다. 할머니는 저를 키우던 시절이 행복하셨는지 그때 기억은 아직 생생하다. 퐁당퐁당 동요를 불러주면 제가 박자에 맞춰 할머니 등을 두드렸단 말을 자주 하신다. 20대 때 군복무 중 세상을 뜬 외삼촌도 자주 찾으신다. 마음 깊이 묻은 자식이라 더 생각나시는 것 같다.”

―치매가 영혼까지는 침범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사랑의 감정은 끝까지 보존되는 것 같다. 애정 표현도 솔직해졌다. 이리저리 재지 않으니 쑥스러워서 못 하던 걸 이젠 거침없이 한다. 예전엔 ‘영롱이 시집보내야 하는디…’ 하셨는데 요즘엔 ‘너 없인 못 산다’고 하신다. 엄마와도 수십 년 된 앙금이 있었는데 치매를 겪게 된 뒤에야 먼저 사과를 하셨다.”

―유튜브 댓글에 ‘치매 환자가 저렇게 멀쩡할 리 없다’ ‘집에서 돌볼 형편이 안 되는 가족들에겐 이상적인 얘기”란 반응도 있더라.

“충분히 이해가 간다. 저는 엄마와 교대로 돌볼 수 있고 간병을 부담스러워할 배우자도 없다. 다만 치매 환자도 잃는 것 보다 간직하는 게 많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치매 하면 말기 모습만 떠올리기 쉬운데 초기와 중기엔 해볼 수 있는 게 많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저도 할머니를 치매 환자로만 대하다가 ‘사람 노병래’를 놓치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 “할머니 떠난 뒤 상상하는 내가 안 미워”

인터뷰를 위해 7일 서울 성북구 자택에서 만난 영롱 씨.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지난달 영롱 씨는 지난 5년의 기록을 책으로 냈다. 제목은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로 지었다. 영롱 씨는 할머니 영상을 찍고 편집하면서, 어머니는 조회 수 올려준다고 영상을 만날 돌려보면서, 할머니는 늘 새로운 소식을 들고 다가오는 딸과 손녀를 맞이하면서 서로 따뜻하게 봐왔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영롱 씨가 유튜브에 올라온 응원 댓글을 읽어줄 때면 “우리 영롱이가 내 눈이여”라고 말한다. 영롱 씨는 거동이 힘들어진 할머니의 다리가 되어주기 위해 1년 전부턴 근력 운동을 해왔다. 단독주택 2층에 사는 할머니가 산책을 나가려면 영롱 씨가 계단을 통해 업고 내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영롱 씨는 “40kg 정도 바벨은 거뜬히 드는 편이라 곧 할머니를 업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할머니가 없는 집은 어떨까 가끔 떠올려 봐요. 할머니 소리에 늘 예민해서 그런지 적막함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요. 무조건적인 사랑을 줬던 할머니의 빈자리가 크겠지만 즐거운 기억을 많이 쌓고 있어서 두렵진 않네요. 이젠 할머니가 떠난 뒤 뭘 할지 상상하는 제가 밉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