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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장걸음서 탭댄스까지… 이족보행 로봇, ‘한걸음의 기적’을 묻다

입력 | 2024-10-11 03:00:00

권병준 연출 ‘새들의 날에…’ 리허설
인간 대신 로봇 13대가 아해를 연기… 이상의 시 ‘오감도’에서 영감 받아
“불안에 돌보기 잊은 슬픈 단면 표현”… 權작가가 ‘신비로운 음악’ 직접 연주



‘새들의 날에: 첫 번째 이야기―13인의 아해의 불안’에는 오늘날 정체불명의 불안을 상징하는 열세 대의 로봇이 등장한다. 이들은 철판으로 만든 무대에서 인간처럼 걷고 발장단을 맞춰 군무한다. 로봇의 발 앞꿈치와 뒤꿈치에 부착된 영전자석과 2개의 모터는 캣워크, 뒷걸음질 등 다채로운 걸음을 보여준다. 예술경영지원센터 제공


13인의 아해(兒孩)가 철판으로 덮인 무대 위를 걷는다. 숲속 정령처럼 자분자분한 걸음이다. 쇠로 만든 다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은빛 술은 조명을 받아 물결처럼 반짝였다. 하얀 무대 벽면엔 3m 높이의 까만 그림자가 드리웠다. 돌연 첫 번째 아해가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열세 번째 아해까지 덩달아 발맞추며 고동치는 소리를 증폭시켰다.

11∼13일 서울 강남구 플랫폼엘에서 초연되는 ‘새들의 날에: 첫 번째 이야기―13인의 아해의 불안’ 연습 현장을 8일 찾았다. 20세기 근대에 만연하던 불안을 상징적으로 담아낸 이상의 시 ‘오감도’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 인간 배우 대신 이족보행이 가능한 열세 대의 로봇이 등장해 아해를 연기한다. 이달 27일까지 서울 각지에서 열리는 ‘2024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프로그램 중 하나다. 예술경영지원센터, 국립극장, 서울문화재단이 주최하고 아트코리아랩 등이 협력했다.

작품은 땅에 발을 붙이고 걷는 행위가 인간에게 갖는 의미를 묻는다. 작품을 연출하고 사운드 및 기술을 총감독한 권병준 작가(사진)는 “인간은 땅을 밟고 하늘을 바라보는 존재로 태어난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집착, 낙오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 오늘날 사람들은 허공을 부유하는 새처럼 살고 있다”고 말했다. “로봇을 제작해 보니 자신의 몸무게를 버티고 일어서서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행위 자체가 기적과도 같음을 알게 됐다. 떠도는 불안 때문에 스스로 돌보기를 잊은 우리 사회의 슬픈 단면을 보여주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무대 위 로봇들은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설정된다. 이들은 사전 설계된 프로그래밍에 따라 철판을 두드리며 이동하는 제의식을 펼친다. 시집 ‘타지 않는 혀’ 등을 펴낸 시인 함성호가 이번 공연에 드라마투르크로 참여해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권 작가는 “겉모습과 행동이 인간과 닮았어도 로봇만이 표현할 수 있는 움직임이 있다. 그 낯설고 신비한 존재감이 샤먼의 이미지와 부합한다고 봤다”며 “목적지에 이르기 위한 걸음이 아닌, 사유와 치유의 수단으로서의 걷기에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2018년부터 로봇을 이용한 전시, 공연을 제작하면서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권 작가가 다채롭게 걸을 수 있는 로봇을 만든 건 이번이 처음. 직진을 넘어 탭댄스, 다이아몬드 스텝, 개다리춤 등 폭넓은 보행이 가능하다. 공연 전반부, 프로그래밍에 따라 움직이던 로봇은 후반부에 이르러 스스로 움직이기도 한다. 사전 설계된 프로그래밍 없이 각자 수집한 위치 정보를 토대로 자유롭게 무대를 활보하는 것. 개발 및 연출에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김택민, 하드웨어 엔지니어 이주미, 이유진 등이 함께 참여했다.

이 같은 움직임에 맞춰 흘러나오는 신비로운 음악은 과거 싱어송라이터, 전자악기 개발자 등으로 활동한 권 작가가 직접 연주한다. 칼림바, 인도 풍금, 아날로그 라디오 등 생경한 소리를 가진 다양한 악기가 즉흥적으로 활용된다. 로봇 군무가 내는 소리를 수집해 그래뉼러 신시사이저로 쪼개고 늘리는 등 실시간으로 변조하는 퍼포먼스도 즉석에서 선보인다.

‘새들의 날에’는 향후 서사적 깊이가 더해진 연극 연작으로 제작될 예정이다. 권 작가는 “저예산으로 제작된 기계가 보여주는 서투른 움직임과 미묘한 떨림, 기계음은 영상 매체보다는 라이브 공연으로 풀어낼 때 관객에게 더 강렬히 다가간다고 생각한다”며 “훗날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 기계적 연극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