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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후벼파는 한마디]

입력 | 2024-10-11 11:00:00


김수영 시인의 젊은 시절 모습. 동아일보DB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중에서, 1965)

학원가 보도(步道)에서 음식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스쿠터를 세워 놓은 큰길가로 총총히 걸어가는 배달라이더에게 감사하다. 주문 몰리는 점심 무렵 오토바이를 손으로 끌면서 대각선 횡단보도를 건너는 배달노동자에게 감사하다. 보행자 푸른 신호등 켜진 횡단보도 앞 정지선에 스쿠터를 세우고 기다리는 배달원에게 감사하다.

편도 2차로 일방통행 길, 황색 신호등 깜빡이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 차를 멈춰 주는 운전자에게 감사하다. 유치원에서 배운 대로 팔을 번쩍 치켜들고 주택가 왕복 2차로 횡단보도를 건너는 어린이 앞에서 차를 세우는 운전자에게 감사하다. 스쿨존에서 시속 30km 이하로 서행(徐行)하는 운전자에게 감사하다. 서행은 차량을 즉시 제동할 수 있는 운행을 말한다.

여러 사람이 뒤섞여 움직이는 보도에서 비켜 달라고 따르릉거리지 않는 자전거 운전자에게 감사하다.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가는 사람에게는 더욱 감사하다. 한강공원 나들목 어귀 ‘자전거 끌고 가세요’라고 적힌 가로 2m, 세로 1m 표지판과 장애물 3개를 보고서 타고 오던 자전거에서 내리는 사람에게 감사하다. 차도로 달리는 전동킥보드 운전자에게 감사하다.

출근길 지하철역 승강장에서 계단을 오를 때 유튜브 채널을, OTT 프로그램을, 해외 축구 경기를 스마트폰으로 보지 않고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는 앞사람에게 감사하다. ‘에스컬레이터에서는 걷거나 뛰지 말고 반드시 손잡이를 잡고 이용해 주세요’라는 안내방송을 들으면서 뛰어 내려가지만 그래도 스마트폰은 보지 않는 사람에게 감사하다.

집으로 가는 길, 시내버스 교통약자석에 피곤한 몸을 내맡겼어도 목주름 깊은 노인에게, 아기를 안은 여성에게 선뜻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에게 감사하다. 만원 버스에서 내릴 사람들이 모두 하차한 다음, 내리는 문으로 올라타는 승객에게 감사하다.

‘범사(凡事)에 감사하라’는 개신교 하나님의 뜻이 완벽하게 실현되는 사회가 아닌 한 당연한 일에 감사하는 것은 짜증스러운 일이다. 시인 김수영(1921~1968)이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썼을 당시는 언로(言路)가 트이지 않았을 때다. 거대한 사회 부조리(不條理)에 대해 옳지 않다고 자유롭게 밝히기 쉽지 않았다. 공개적으로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을 터다. 그래서 시인은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자조(自嘲)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를 지금 읽으며 고개를 끄덕인다면 우스운 일이 되고 만다. 언론의 자유와 ‘만인의 만인에 대한 미디어’가 존재하는 오늘날 이른바 ‘거대 악(惡)’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대한 울분의 표출은 차라리 습관적이다. 위정자를, 자본을, 사회구조를 손가락질하며 목청을 높이는 것은 간편한 일이 됐다.

‘방 한구석에 앉아 쉽게’ 분노하는 동안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게 돼 버리는 것을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사소한 일이라고 치부하며 무뎌지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소소한’ 일에는 더 이상 분개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닐까.

배달라이더의 스쿠터가 보도로 달리지 않게 할 수 있는 방책을 내놓는 정치인에게 다음 대통령선거에서 한 표를 던지겠다. 누가 될지 모를 그 정치인에게 다음 문장을 선물한다. “그런데 분노는 고칠 수 있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만 터지는 거예요.”(‘스텔라 마리스’, 코맥 매카시, 2023)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