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알프스 수네가 5개 호수 트레킹 도중에 만난 슈텔리호수. 비가 그치고 안개 구름이 걷히자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로고로 쓰인 마터호른이 크리스털처럼 맑은 호수 위로 모습을 서서히 드러냈다.
● 수네가 5대 호수 트레킹
알프스를 속속들이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트레킹이다.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의 워낭 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면 평화로움을 느끼게 된다. 목동들은 방목하는 소들이 어디로 가는지 쉽게 알기 위해 커다란 방울을 채운다. 가을이 되면 산 위에서 방목했던 소들이 마을로 내려오고, 체어마트 마을에는 봄부터 여름까지 수고했던 목동들을 위한 ‘목동 축제(Shepherd Festival)’를 벌인다. 체어마트의 중심가인 반호프 슈트라세에는 축제와 음악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다.
마터호른 빙하 파라다이스 전망대에서 바라본 구름.
체어마트 시내에서 땅속 터널을 45도 각도로 상승하는 철도를 타니 3분 만에 수네가 파라다이스역(2288m)에 도착했다. 마터호른을 정면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한 테라스다. 그런데 비구름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전망대 카페에서 고민을 했다. 비 오는 날씨에 트레킹을 해? 말아? 옆에서 감자칩에 맥주를 마시고 있던 네덜란드 여행객이 어제 맑은 날씨에 트레킹한 사진을 보여준다. 순간 부러움이 부글부글. 그래, 일단 출발하자! 마터호른을 볼 수 없다 하더라도, 대자연의 품에 안겨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다시 곤돌라를 타고 블라우헤르트(2571m)까지 올라간다. 5개 호수 트레킹을 알리는 노란색 표지판만 따라가면 쉽게 트레킹을 할 수 있다. 드디어 첫 번째 호수인 슈텔리호수(슈텔리제)가 나타났다. 수많은 초콜릿 광고에 나온 전설의 호수! 마터호른이 비친다는 포토제닉한 스폿이다. 그런데…. 하늘도 호수도 모두 곰탕이다.
거의 1시간을 기다려도 구름은 열리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다음 호수로 출발했다. 3000∼4000m급 준봉들 사이로 쉴 새 없이 흘러가는 구름이 폭포수처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가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제색도의 ‘제(霽)’는 비나 눈이 그친 후 날씨가 쾌청해진다는 뜻. 온종일 비가 내린 후 습기 머금은 산이 더욱 청명해 보일 때 쓰는 글자다. 좀 더 걷다 보니 드디어 구름이 걷히면서 마터호른이 두둥! ‘마터호른제색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언젠가 백두산 천지에 갔을 때도 그랬다. 잔뜩 내려앉은 비구름에 싸여 천지는 보이지 않았다. 천지 전망대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고, 기도하길 30분이 지났을까. 그 정성에 감동을 받았는지, 드디어 천지가 개벽했다. 처음부터 맑은 날씨에 만나는 천지보다 구름을 헤치고 서서히 드러나는 천지는 더욱 신비로웠다. 구름을 뚫고 나타난 마터호른도 좌선하고 있는 미륵불처럼 신성해 보였다.
야생화가 피어 있는 구름 속을 부지런히 걷다 보니 숲속에 숨어 있는 그린지호수(2334m), 그륀호수(2300m), 에메랄드빛 모스예호수(2148m)를 만났다. 마지막 라이호수(2232m)는 수네가 파라다이스 전망대 바로 아래에 있었다. 그런데 이 호수에도 마터호른이 비치지 않는가. 굳이 3시간을 걷지 않아도 될 일이었지만, 알프스의 품속에 안겼던 순간들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추억이 됐다.
마터호른은 알프스 4000m급 고봉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등정됐을 만큼 난공불락의 봉우리였다. 1865년 7월 14일. 영국 에드워드 휨퍼의 등반팀이 마터호른을 처음 정복하면서 체어마트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체어마트 시내 성당 앞에는 마터호른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휨퍼 등반대의 끊어진 로프도 전시돼 있다. 당시 등반대는 하산길에 7명을 묶은 로프가 낙석에 맞아 끊어지면서, 4명이 1000m 아래 빙하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체어마트 숙소에서 머물 때 가장 매력적인 곳은 바로 베란다다. 시내 어느 곳에서도 4478m 마터호른 봉우리가 보이기 때문이다. 해 질 녘 베란다에 앉아서 지역 특산품인 체어마트 맥주를 마셨다. 해가 저물며 빛에 따라, 바람과 구름에 따라 변화하는 마터호른의 모습은 어떤 영화나 드라마, 스포츠 생중계보다도 더 흥미진진했다.
알프스 산속 풍경을 창밖으로 즐기는 산악열차.
열차를 타면서 한 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스위스 산속의 초원은 어떻게 그렇게 깨끗해 보일까? 다른 나라 같으면 잡목도 있고, 억새와 넝쿨, 잡초도 우거져 있을 텐데. 알프스 산속 들판은 골프장의 페어웨이처럼 산뜻하다. 소가 풀을 다 뜯어 먹어서일까? 자세히 보니 커다란 풀 깎는 기계가 경사진 산비탈을 다니고 있었다. 깎인 풀더미는 겨울철 건초 사료로 쓰기 위해 트럭에 실려 보관창고로 간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스위스 농촌의 평화로운 모습은 절대로 자연적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스위스의 경관 농업은 주민과 공무원의 철저한 관리 속에 이뤄지는 ‘관광 인프라’였다.
몽트뢰에서 골든패스 파노라마 열차를 타고 약 1시간 반. 그슈타트역에서 내렸다. 콜뒤피용에 있는 케이블카를 타고 ‘글레이셔 3000’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도착하니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역에 도착한다. 뒤편 계단을 오르면 두 개의 산봉우리를 잇는 강철 현수교인 ‘티소 피크 워크’가 있다. 길이 107m, 너비 80cm의 출렁다리를 건너 전망대에 서니 눈 덮인 24개 이상의 4000m급 알프스 봉우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아이거, 융프라우, 마터호른, 그랑콩뱅은 물론이고 저 멀리 프랑스 몽블랑까지….
전망대 아래쪽 평원에는 빙하가 펼쳐진다. 푸른 하늘색과 하얀 빙하가 어우러지는 색다른 트레킹 코스다. 이곳 빙하에는 크레바스가 없어서 안전하다. 그러나 빙하 평원의 곳곳에는 얼음이 녹아서 흘러내리는 도랑물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수천만 년 동안 녹지 않는 빙하지대로 유명했던 ‘글레이셔 3000’의 얼음도 기후변화로 거의 다 녹아내리기 직전이다. 빙하 끝까지 다녀오는 2시간 코스를 완주하려면 방수가 되는 튼튼한 등산화가 필요했다.
산 정상 케이블카 역에는 르카르노체 카페가 있다. 알프스 연봉을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산 위에서 마시는 핫초코 한잔은 빙하 바람에 떨었던 몸을 녹여 주는 특효약이다.
글·사진 체어마트=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