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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 칼럼]이시바 총리의 일본,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을까

입력 | 2024-10-11 23:15:00

日 과오 직시하자는 비주류 이시바 당선
한일관계 개선 희망 다시 보이는 청신호
이시바, 당내 기반 약해 운신의 폭 좁아
기대 못 미쳐도 화해 손 내밀면 잡아주자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9월 27일 오후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가 있었다. 1차 투표 결과, 다카이치 사나에가 181표로 1위, 이시바 시게루가 154표로 2위였다. 두 사람이 결선투표에 진출했다. 이시바와 다카이치라니. 아홉 명 후보 중에서 가장 극과 극에 서 있는 두 사람이 결선에 올랐다. 다카이치는 당당하게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는 사람이다. 반면 이시바는 과거의 과오를 직시하지 않는 일본을 공공연히 비판한다.

거실에서 결선 중계를 시청하는데 손에서 땀이 났다. 선거 결과를 기다리며 초조했던 적이 없었는데 남의 나라 선거에 이렇게까지 긴장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오후 3시부터 중요한 화상회의가 있었기 때문에, 왜 하필 이 시간에 회의냐고 투덜거리며 내 방으로 들어갔다. 마음은 콩밭에 있으면서 회의에 집중하려 하고 있는데, 복도에서 내 방으로 빠르게 걸어오는 아내의 발소리가 들렸다. 중요한 회의 중인 걸 알면서도 아내가 내 방문을 열었을 때, 나는 이시바가 이겼다는 걸 알았다. 얼굴을 돌리지 않은 채, 나는 아내에게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 보였다.

남의 나라 선거에 나는 왜 그렇게 떨었던가? 아내는 왜 감격해서 내 방문을 열었던가? 이시바 총재의 당선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이 과거를 극복하고 좋은 이웃으로 공동 번영을 추구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는 희망.

그런 희망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1998년의 김대중-오부치 선언이었다. 오부치 게이조 총리는 식민 지배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표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그 사죄를 높이 평가하며 좋은 이웃으로 미래지향적 관계를 발전시키자고 화답했다. 그 뒤에 상호 문화 개방이 있었고 한국에서는 일본 영화 ‘러브레터’가, 일본에서는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가 공전의 히트를 했다. 2001년에는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다 희생한 이수현 씨가 일본 사회에 깊은 감동을 주었고, 2002년에는 월드컵 공동 개최가 있었다. 한국이 4강에 진출한 다음 날, 내 집 창문 옆을 지나던 일본 꼬마들이 “오메데토 고자이마스(축하합니다)”라고 외치던 소리가 이제는 마치 꿈처럼 희미하다. 지금 일본인들은 한국 드라마를 즐기고 한국인들은 일본 관광을 즐기지만, 한일 관계는 ‘겨울연가’ 시절보다 확연히 퇴화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그 이전에 있었던 무라야마 담화나 고노 담화의 연장선에 있다. 무라야마 도미이치와 고노 요헤이 그리고 오부치의 역사 인식을 계승하는 이시바의 총리 취임으로 이제 한국과 일본은 정말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을까? 쉽지는 않겠지만 보이지 않던 희망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희망이 현실이 되려면 일본은 물론 한국의 노력도 필요하다.

아직은 이시바가 운신의 폭이 넓지 않다. 각종 스캔들로 자민당 지지율이 역대급으로 낮은 상황에서 10월 27일에 중의원 선거가 있다. 국민들은 자민당의 전면적 쇄신을 요구하고 있지만, 당내 기반이 약한 이시바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베 신조는 세계경제가 회복되던 시기에 집권했고 양적완화로 엔고를 엔저로 전환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양적완화를 축소해야 하는데, 미국 경제와 중동 정세가 불안하다. 실질임금이 다시 하락하기 시작한 것도 고민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시바 총리에게 그의 정치적 역량으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요구를 한다면 양국 관계는 개선되기 어렵다. 이시바 내각에는 아베파 의원이 없다. 아베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다카이치는 권토중래를 노리며 이시바에게 각을 세우고 있다. 이때 우리가 우리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시바를 비난하고 나서면 그의 정적인 다카이치를 돕는 꼴이 된다. 지금은 한국에서 일본의 양심으로 칭송받는 무라야마지만, 정치적 생명을 걸고 사죄 담화를 냈던 그 무라야마도 총리 시절에는 한국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던 것을 상기해야 한다.

이시바 총리는 아마도 진심으로 한국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 것이다. 충분하지 않고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그 손을 잡아야 한다. 그게 끝이 아니라 출발선이다. 1층을 세우면 언젠가 그 위에 2층을 세울 수 있다. 원래 계획하던 높이가 아니라고 해서 1층을 허물면 건물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한일 관계가 살벌하던 시절에도 일본의 사죄를 촉구하며 비주류의 자리를 겁내지 않던 이시바다. 그를 총리로 선택한 일본이라면, 언젠가는 우리와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