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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초차 올림픽 銀이 준 선물, 김윤만 “金 못 딴 덕분에 더 넓은 세상 만나”[이헌재의 인생홈런]

입력 | 2024-10-14 12:00:00


한국 동계올림픽 첫 메달리스트인 김윤만 대한체육회 대회운영부장이 8월 파리 올림픽 펜싱 경기가 열린 그랑팔레에서 셀카를 찍은 모습. 김윤만 제공


대한민국 최초의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김기훈 울산과학대 교수(57)다. 김 교수는 1992년 알베르빌 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0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이어 열린 계주에서도 정상에 올라 2관왕을 차지했다.

김 교수의 화려한 명성에 가려져 있지만 한국 동계올림픽 첫 메달이라는 역사를 쓴 사람은 따로 있다. 당시 19세였던 김윤만 대한체육회 대회운영부장(51)이다. 김 교수가 쇼트트랙 남자 1000m에서 금메달을 따기 하루 전 김윤만은 스피드스케이트 남자 1000m에서 깜짝 은메달을 획득했다.

김윤만이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트 남자 1000m에서 깜짝 은메달을 딴 뒤 활짝 웃고 있다. 대한체육회 제공


당시 김윤만의 메달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윤만 자신도 메달을 딴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올림픽 직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주니어 선수권 대회 남자 500m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최고의 선수들이 모두 출전하는 올림픽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그런데 야외 스케이트장에서 열린 올림픽 1000m에서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모든 게 달라졌다. 전광판 뜬 순위표에 그의 이름이 2위에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 취재진의 관심은 온통 김기훈에게 쏠려 있었다. 한국 취재진들은 김윤만의 경기장이 아니라 하루 뒤에 경기를 치를 김기훈의 훈련장에 몰려가 있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한 방송 기자가 부랴부랴 경기장으로 달려왔다. 얼마나 급했는지 카메라도 가져오지 못했다. 결국 옆에 있던 일본 NHK 기자의 카메라를 빌려 시상식 장면만 찍었다. 김윤만은 “일본 선수들이 잘하던 종목이라 일본 내에서는 생중계가 됐었다. 경기를 본 일본 교포분이 한국에 있는 우리 집에 전화를 했다더라.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그게 무슨 소리냐’며 처음엔 믿지 않으셨다고 한다”며 웃었다.

김윤만의 선수 시절 경기 모습. 동아일보 DB


한국의 첫 동계올림픽 메달에 갑자기 난리가 났다. 한국 선수단은 축제 분위기였고, 대통령도 축전을 보냈다. 그런데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하루 뒤 첫 금메달이 나오면서 스포트라이트 온통 김기훈에게 집중됐다.

주인공이 뒤바뀐 건 단 0.01초 차이 때문이었다. 당시 김윤만은 1분14초86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땄는데 금메달을 딴 올라프 징케(독일·1분14초85)와는 단 0.01초 차였다. 만약 김윤만이 첫 금메달을 땄다면 그의 이름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김윤만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첫 올림픽 출전이었기에 부담 없이 즐기는 마음으로 재밌게 타면서 좋은 결과가 나왔다”며 “비록 금메달은 아니지만 대한민국 첫 동계올림픽 메달리스트라는 뿌듯함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 “만약 그렇게 어린 나이에 금메달을 땄다면 바로 운동을 그만뒀을 것이다. 은메달의 아쉬움이 있었기에 이후 금메달을 향해 더 노력할 수 있었다”며 “결국 올림픽 금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당시의 노력이 지금처럼 어엿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밑바탕이 될 수 있었다”고 했다.

대한민국 동게올림픽 첫 메달리스트 김윤만은 대한체육회 직원으로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김윤만 제공


김윤만은 2년 뒤 열린 릴레함메르 올림픽에 출전했으나 경기 중 상대가 레인을 침범하는 등의 불운이 겹치며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1998년 나가노 올림픽에서도 역시 노메달에 그쳤다. 하지만 그의 실력은 언제든 정상을 노려볼 만하긴 했다. 1995년 밀워키 세계스프린트선수권 대회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한 게 좋은 예다. 하지만 올림픽 메달은 하늘이 점지해 주는 것이었다. 김윤만은 “나가노 올림픽 시즌에도 월드컵 대회에서는 1등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올림픽 무대의 부담을 알고 난 뒤에는 이상하리만치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았다”고 했다.

나가노 올림픽 이후 은퇴한 그는 지도자가 돼 2002년 솔트레이크 올림픽에는 코치로 참가했다. 이규혁과 최재봉 등이 그의 제자였다.

이후 경기도체육회 빙상팀 등에서 활동하던 그는 2008년 새로운 도전에 나서게 된다. 대한체육회 공채에 합격해 행정가로 변신한 것이다.

동계올림픽 첫 메달리스트란 후광으로 합격한 것은 아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우연히 대한체육회가 직원을 뽑고 있다는 걸 안 그는 무작정 시험을 봤다. 면접관들은 그에게 “대체 왜 체육회에 들어 오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지도자가 아닌 행정가로 후배 선수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고 답했다. 그렇게 그는 35세의 나이에 대한체육회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역대 올림픽 메달리스트 최초의 대한체육회 직원이었다. 입사 동기들 중에는 그보다 12살 어린 ‘띠동갑’도 있었다.

파리올림픽에서 코리아하우스 단장 수행으로 참가한 김윤만. 김윤만 제공


적지 않은 나이에 입사한 그는 막내답게 밑바닥부터 일을 시작했다. 전국체전 등이 열릴 때는 각 경기단체와 시도체육회의 깃발 등을 배치해야 하는데 그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깃발을 나르는 것이었다.

나이가 어린 회사 선배들에게도 깍듯이 대했다. “선배님, 선배님” 하면서 따라다니며 일을 배우자 처음엔 껄끄러워하던 선배들도 그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보다 나이가 적은 선배들은 그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선배님들이 나이 많은 후배를 정말 잘 챙겨주셨다. 덕분에 처음 해보는 조직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고 했다.

대한체육회 입사 후에도 그의 ‘올림픽 여정’은 계속됐다. 입사 후 2년 뒤 그는 대한민국 선수단 지원단의 일원으로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 참가했다. 그는 “스케이트 후배들인 이상화와 모태범, 이승훈 등이 그 대회에서 모두 값진 금메달을 땄다. 내가 못해본 올림픽 금메달을 딴 후배들의 성장이 너무 기뻤다”고 했다.

4년 뒤 소치 올림픽에서는 선수단 지원센터인 코리아 하우스에서 일했다. 국내에서 열린 2018년 평창 올림픽에서는 조직위에 파견돼 아이스베뉴 부장을 맡았다.

여름 올림픽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훈련 캠프 준비단에 소속됐고, 올해 열린 파리 여름 올림픽에서는 코리아하우스 단장 수행을 담당했다.

김윤만은 일주일에 한 번 한강라이딩으로 건강을 유지한다. 김윤만 제공


입사 17년 차인 올해 초 그는 대회운영부장으로 승진했다. 35세 신입사원으로 출발해 어느덧 관리자가 된 것이다.

대회운영부는 대한체육회 내에서 전국체전과 동계체전, 소년체전 등 각종 대회의 담당하는 부서다. 이달 11일부터 17일까지 경남 김해 등에서 열리고 있는 제105회 전국체전은 그의 책임하에 준비됐다. 그는 “체육회 산하에 49개 종목을 모두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며 “빙상에만 있었으면 이렇게 넓은 세상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새로운 분야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된 게 내게는 큰 자산”이고 말했다.

그가 하는 업무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다. 각 종목단체와 17개 시도체육회 관계자들과 만나다 보면 밥자리, 술자리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한 적게 먹으려 노력한다. 그는 “보이는 대로 먹다 보면 살이 찔 수밖에 없다. 2개 먹을 걸 하나만 먹으려 하는 편”이라며 “입사 초기만 해도 일주일에 4, 5차례 술자리를 갖는 게 다반사였다. 하지만 요즘은 최대한 자리를 줄이고, 자리를 갖더라도 1차에서 끝내려 한다”고 말했다.

그가 건강관리를 위해 빼놓지 않고 하는 건 한강 자전거 라이딩이다. 일주일에 한 번은 한강에서 두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탄다. 그는 “좋은 자전거는 아니고 2019년 작고하신 아버지가 타던 낡은 자전거다. 아버지의 유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자전거를 탄다”며 “요새 나오는 자전거처럼 가볍지 않다. 그런데 오히려 무거운 자전거라 운동이 더 되는 것 같다”며 웃었다.

김윤만 대한체육회 대회운영부장이 주먹을 쥐어 보이고 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후배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입사 때의 초심을 잃지 않으려 한다는 그는 남은 직장 생활 동안 국가대표 지원부서에서 일해보는 꿈을 갖고 있다. 그는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진천선수촌이나 평창동계훈련센터에서 일해보고 싶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후배들의 성장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 우연히 스케이트를 신은 후 지금까지 스포츠를 통해 많은 혜택을 받으면서 살아왔다”며 “정년이 지나 은퇴를 하게 되면 어린이나 유소년 등을 위해 빙상장에서 재능기부를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