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장
1일 일본에서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신임 총리가 취임하자 그에 대한 많은 칼럼과 논평이 쏟아져 나왔다. 그럼에도 뒤늦게 한마디 보태고자 한다. 한일 언론에 회자되는 “상대가 납득할 때까지 사죄해야 한다”는 그의 발언을 도쿄 특파원 시절 세상에 내보낸 당사자로서, 그간 함구해 온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어서다.
2017년 5월 23일자 동아일보에 인터뷰 기사가 나간 뒤 일본에서는 약간의 소동이 있었다. 산케이신문이 발언 경위를 이시바에게 캐물었고 그는 “‘사죄’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서로가 납득할 때까지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얼버무렸다. “그렇다면 동아일보에 항의하라”는 산케이신문의 요구에는 “그럴 생각은 없다”고 답했다. 이 옥신각신은 자기들끼리 이뤄졌고, 필자는 뒤늦게 지면을 통해 이를 읽었다. 다만 기사대로 해석하면 동아일보가 ‘오버’한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인간 존엄 훼손, 해선 안 되고 죄송한 일”
일본군위안부 관련 구절은 두 단락에 걸친 그의 발언을 합친 것이었다. 그는 일본 내에서 나오고 있는 여러 주장을 주욱 나열한 뒤 “하지만 한국인이건, 일본인이건, 미국인이건, 인간의 존엄에 상처를 주는 것은 해선 안 될 일이고 죄송한 일”이라고 했다. 필자가 ‘사실 몇 차례 사과도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하다’고 하자 “바로 그 점을 꼭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알아줄 때까지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말을 받아 필자는 다시 당시 아베 신조 총리의 접근 방식(‘정부출연 배상금 10억 엔 냈으니 모두 해결됐다’거나 할머니들에게 사죄 편지를 쓸 계획에 대해 ‘털끝만큼도 없다’고 한 국회 답변 등)이 한국 내에서 몰고 온 반발을 지적했다. 이에 그는 “어떤가요. 정말 일본인이 성실하게, 인간의 존엄을 훼손한 것에 대해 죄송했다고 말하면 알아주시긴 할까. 그런 식으로 노력해 온 일본인은 많았다. 그러나 결국 알아주지 않더라는 좌절감, 실망감이 적지 않다. 아무리 성실하게, 마음으로부터 죄송하다고 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기사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문장 일부가 생략됐지만 정확한 워딩은 이랬다. 잘 들어보면 그는 ‘사죄’라는 단어보다는 ‘죄송하다(申し訳ない)’ ‘사과하다(謝る)’ 등 경어나 구어체 표현을 많이 썼다.
일관됐던 7년 전, 17년 전 인터뷰
당시 ‘녹음 파일이 있다’고 나서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삼가기로 했다. 그러잖아도 당내 ‘왕따’였던 이시바가 매우 곤란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한일 관계가 살벌한 분위기에서 일본 정치인들 모두가 기피하는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 응해 준 것도 고마웠다. 실제 인터뷰 도중 필자는 ‘(기사가) 당신에게 피해를 줄까 솔직히 우려된다’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는 ‘공부하는’ 정치인이다. 예컨대 2002년부터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지 않았는데, 2007년 인터뷰에서 그 이유에 대해 ‘역사 공부를 한 뒤부터 차마 갈 수가 없었다’고 했다. ‘군사 오타쿠’적인 면이나 이상주의적 면모도 있지만 지방창생상을 맡아 ‘인구 감소가 최대의 안보 위기’라며 지방 살리기를 주창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노회한 정치인들을 상대로 조율하고 설득하고 이끄는 권력자 역할이 적성에 맞을지는 의문이다. 이시바 총리가 역사 문제나 이웃국가 관계에서 소신을 펼 수 있으려면 넘어야 할 산이 참 많아 보인다.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장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