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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임금 차별 금지’ 불씨 지핀 美 레드베터 별세

입력 | 2024-10-16 03:00:00

같은 직책 男직원과 월급 격차에
성차별 소송 제기 대법원까지 가
‘공정임금법’ 오바마 1호 법안으로




미국에서 ‘남녀 동일임금’의 아이콘으로 불려 온 여성평등 운동가 릴리 레드베터(86·사진)가 12일(현지 시간) 노환으로 별세했다.

1938년 미국 앨라배마주 잭슨빌에서 태어난 레드베터는 결혼 뒤 육아와 가사에 전념하다가 41세에 타이어 제조 기업인 굿이어에 관리자로 채용됐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그에게 변화가 찾아온 건 은퇴를 앞둔 1998년 우편함에서 직원들의 급여목록이 적힌 익명의 쪽지를 발견하면서다. 당시 레드베터의 월급은 3727달러였지만, 쪽지에 따르면 같은 직책에 있던 남성 직원 14명의 월급은 그보다 최소 559달러, 최대 1509달러 많았다. 레드베터는 당시 “숨이 멎을 것 같은 굴욕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이듬해 그는 앨라배마주 연방법원에 굿이어를 상대로 “회사의 성차별로 받지 못한 임금을 돌려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굿이어에 미지급 임금과 손해배상을 합쳐 380만 달러(약 51억6000만 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지만, 항소심에서 이 결정이 뒤집혔고, 사건은 대법원까지 갔다. 2007년 대법원은 앞선 판례들을 언급하며 “첫 불평등 급여를 받은 날로부터 180일 이내에 청구를 제기했어야 했다”며 결국 굿이어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당시 미 법조계에서 ‘진보의 상징’으로 불린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전 대법관이 강력한 소수 의견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돌파구가 열렸다. 그는 “180일이라는 기간은 소수자 집단에게 너무 짧고 불공평하다”며 의회에 강력하게 입법을 촉구했다.

2009년 의회는 소송 기한을 2년으로 늘린 ‘릴리 레드베터 공정임금법’을 통과시켰다. 그해 1월 29일 갓 취임한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1호 법안’으로 서명해 유명해졌다. 레드베터는 2008년과 2012년에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 무대에 올랐고, 그의 자서전은 국내에도 출간됐다. 이달 10일엔 그의 삶을 다룬 영화 ‘릴리’가 미국에서 개봉됐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13일 X에 “레드베터는 개척자가 되려던 게 아니라, 그저 열심히 일한 대가로 남자와 같은 급여를 받고 싶을 뿐이었다”라며 고인을 추모했다. CNN 등은 지난해 기준 미국의 정규직 여성 근로자의 중간소득은 남성의 84%에 그쳐 여전히 성별 임금 격차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