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바람 불고 비까지 몰아쳐, 발이며 휘장까지 쏴 하는 가을 소리.
촛불 가물대고 물시계도 그칠 즈음, 뒤척뒤척 베개에 비스듬히 기대 보고, 일어났다 앉았다 평온치 않은 마음.
세상사 유수처럼 제멋대로 흘렀으니, 돌아보면 한바탕 꿈인양 덧없는 인생.
취향(醉鄕)으로 가는 길이 평탄해 자주 가느라, 딴 길은 아예 갈 엄두도 못 냈지.
(昨夜風兼雨, 簾幃颯颯秋聲. 燭殘漏斷頻欹枕, 起坐不能平.
世事漫隨流水, 算來一夢浮生. 醉鄉路穩宜頻到, 此外不堪行.)
―‘오야제(烏夜啼)’ 이욱(李煜·937∼978)
취향, 삶의 지향을 망각한 채 주색에 탐닉한 미망(迷妄)의 세계. 시인은 그곳을 향한 길이 평탄하였기에 ‘딴 길은 아예 가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고 탄식한다. 비바람 속 가을밤을 지새우며 ‘덧없는 인생’에 심란해한다. 놀랍게도 이 노래의 주인공은 일국의 제왕에서 망국의 신하로 전락한 혼군(昏君). 그 탄식과 회한마저 군주라기엔 너무나 연약하고 무기력하다. 한데 문학사는 이 혼군을 ‘천고사제(千古詞帝)’, 역사에 길이 남을 사(詞)의 제왕이라 치켜세운다. 망국의 한이 서린 애상미(哀傷美)와 굴곡진 삶에서 우러나온 진정성이 강한 호소력을 지녔다고 인정한 때문이리라. 시인의 비극이 문학의 광휘로 남는다는 아이러니를 실감한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