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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계관은 사그라진다… 황제도 종교도 승리를 선언한 순간부터 타락[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입력 | 2024-10-20 22:57:00

〈91〉월계관의 진정한 주인은
월계관 쓴 황제, 권력-생명 필멸
죽음을 이겨낸 예수의 기독교… ‘신의 죽음’ 선언한 철학이 부정
승자는 역사의 종언 꿈꾸지만… 모든 제국은 끝나고 역사는 계속




월계관을 쓴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모습을 양각한 장신구.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누가 승리자인가? 당신인가? 당신이 무엇이기에? 합격생이기에? 정규직이기에? 미남미녀이기에? 사장님이기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기에? 대통령이기에? 황제이기에? 장신구에 새겨진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모습을 보라. 이마에 드리워진 월계관이 황제라는 높은 지위에 어울린다. 월계관은 뛰어난 성취를 이룬 승리자에게 주어져 왔다. 티베리우스는 황제가 되기 이전 장군으로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기도 했으니, 그 누구보다 월계관이 어울리는 사람인지 모른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철학자 필론에 따르면 티베리우스 황제가 다스릴 때 로마 제국 전역에 법이 공정하게 시행되었고, 정복자와 피정복자가 잘 어울려 살았으며, 잔혹한 검투사 경기가 중단되었고, 치안이 물 샐 틈 없었고, 재정 낭비가 없었고, 물산이 넘쳐나서 모두 행복을 누렸다고 하니 티베리우스는 정말 월계관이 어울리는 멋진 승리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승리는 얼마 가지 않는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영생을 누리지 못하고 죽는다. 그 역시 필멸자였던 것이다. 그의 성취조차 의심스럽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다스리던 바로 그때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 처형되었다. 그는 제국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정복민과 피정복민의 조화에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뒤를 이은 칼리굴라 황제는 검투사 경기를 재개했고, 국고를 탕진했고, 성적 방종을 일삼다가 통치한 지 4년도 못 되어 근위대장에게 살해당했으니, 티베리우스 황제는 권력의 안정적인 재생산에 실패한 정치가였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그의 성취도 그의 목숨만큼이나 오래가지 못했으니, 그의 월계관도 쓸쓸해 보일 수밖에. 그래서 묻게 된다. 월계관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16∼17세기경 플랑드르 지방에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해골 그림. 승리한 것은 죽음 그 자체라는 듯 해골에 월계관이 드리워져 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월계관의 진정한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죽음인가. 16∼17세기경 플랑드르 지방에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해골의 모습을 보라. 이 해골에도 자랑스럽게 월계관이 드리워져 있다. 누군가 승리한 것이다. 그런데 대체 누가 승리했단 말인가? 인간은 결국 해골이 되지만, 해골이 되고 나면 그 신원을 파악하기조차 어렵다. 이 해골의 주인 역시 생전에 승리자의 영예를 누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 그것이 누구의 명예인지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승리한 것은 신원 모를 인간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이다. 이 플랑드르 회화에서 해골은 죽음을 상징한다.

17세기 화가 루벤스의 작품 ‘죄와 죽음에 승리한 예수’.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듯 발밑에 해골과 뱀이 깔려 있다. 사진 출처 뮤추얼아트 홈페이지

월계관의 진정한 주인은 죽음이 아니라 신이 아닐까. 17세기의 화가 루벤스 작품 ‘죄와 죽음에 승리한 예수’를 보라. 이 그림에서 예수의 발밑에 해골과 뱀이 깔려 있다. 여기서 해골은 죽음을, 뱀은 죄를, 발밑은 패자의 위치를 상징한다. 죽음조차 예수에게 승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는 부활함으로써 죽음을 이긴 승리자가 되었다. 그뿐이랴. 지구 위에 얹힌 예수의 손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가 이 세계의 진정한 지배자임을 나타낸다. 이제 세속 권력이 예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세속 권력을 심판한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 처형되지만,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는 이 처형의 순간은 곧이어 도래할 승리의 순간을 예비하는 단계에 불과하다. 부활은 신뿐 아니라 그 신을 믿는 인간들에게도 왔다. 오랫동안 박해받던 그리스도교는 마침내 로마 황제의 공인을 받았고,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기성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신교가 생겨나고, 급기야는 그리스도교 도덕 자체를 비판하고 신의 죽음을 선언하는 철학자마저 등장한다. 그가 보기에 약자의 궁극적 승리를 선양하는 그리스도교 도덕은 강자의 탁월함을 인정하는 로마적 도덕을 부정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부정은 다시 부정될 때가 왔다. 이제 신이 진정 죽을 때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주장한 철학자도 얼마 못 가 죽는다.

그렇다면 누가 진정한 승리자인가. 로마 황제인가, 그리스도교인가, 니체의 철학인가. 승리자는 대개 역사의 종언을 꿈꾸는 법. 자신과 더불어 혼란과 변화는 끝나고 영원한 평화가 깃들 것으로 생각한다. 자신의 제국만큼은 그냥 사그라질 잔물결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것이 무력으로 건설한 정치적 제국이든, 믿음으로 건설한 신앙의 제국이든, 철학으로 건설한 사상의 제국이든. 그러나 승리를 선언한 순간부터 조직은 타락하기 시작하고 믿음은 부패하기 시작하며 사상은 왜곡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역사는 그들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리하여 한때의 승리자들은 역사를 초월하는 대신 역사 “속에” 자리매김한다. 그렇다면 마지막 승리자는 역사인가? 그 역사는 누가 쓰는가? 승자가 역사를 쓴다고? 승자가 역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쓰는 이가 승자다. 그러나 자기가 쓴 정사(正史)라고 주장하는 순간 그 역사서술 역시 도전받기 시작한다. 역사는 거듭 새로이 쓰이기 마련. 이제 서로 경쟁하는 역사들끼리 전쟁이 벌어진다.

역사는 정치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누가 이 피 흘리는 역사 전쟁의 승리자인가? 당신인가? 당신이 무엇이기에? 정치권력과 가까운 역사편찬기관의 수장이기에? 진보주의자이기에? 보수주의자이기에? 특정 정치적 상황이나 권력에 복무했던 역사는 결국 빛을 잃기 마련. 역사 전쟁의 월계관은 사료와 대결하여 진실하고도 풍부한 이야기를 구성해 내는 사람에게 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