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 ‘니혼히단쿄’ 다나카 데루미 대표위원 새하얀 빛 번쩍… 도시 전체 잿더미 만주서 태어나 나가사키서 원폭 체험… 日정부 피폭자 방치에 구제운동 나서 국제정치 주류인 핵 억제도 이상주의… 한국 등에 반성·사과하는 모습 보여야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된 일본 원폭피해자단체협의회(니혼히단쿄)의 다나카 데루미 대표위원.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그들은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의 엄청난 노력은 핵 금기를 확립시키며 지난 80년간 전쟁에서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게 했다.”
이달 11일 노벨위원회는 일본 원폭피해자단체협의회(日本被團協·니혼히단쿄)를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단체)로 선정하며 이같이 밝혔다. 북한, 러시아 등의 핵무기 사용 위협으로 어느 때보다 핵 위험이 고조되고 있는 국제사회에 ‘핵 확산 방지’라는 메시지를 절실하게 던졌다는 해석이 나왔다.
일본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가해자로서 책임에는 침묵하고 자신들이 당한 핵무기 피해를 강조한다는 비판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하지만 ‘핵무기 없는 세상’을 외치는 니혼히단쿄와 원폭 피해자들의 진정성은 국제사회에서 의심받지 않는다. 일본어로 피폭자를 뜻하는 ‘히바쿠샤(被爆者·Hibakusha)’는 영어로도 그대로 쓰이며 국제 공용어가 됐다. ‘핵은 핵으로 맞서야 한다’는 핵 억지 이론이 힘을 얻고 있는 시대. 세계는 왜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까. 니혼히단쿄를 이끄는 다나카 데루미(田中熙巳·92) 대표위원을 16일 만났다. 도쿄 인근에 사는 그는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거주하는 대표와 함께 니혼히단쿄 대표위원 3인 중 한 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 “공습경보 울리더니 세상이 새하얘져”
다나카 대표를 만난 건 자택 근처 커피숍이었다. 남색 양복의 왼쪽 가슴에 평화를 염원하고, 원폭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상징물인 종이학이 그려진 빨간색 배지를 달고 있었다. “노벨상 수상자를 만나 영광”이라고 인사를 건네자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며 겸손해했다. 다음은 다나카 대표와의 일문일답.
―수상 소식은 어떻게 접하셨나요.
“발표일은 알고 있었어요. 전에는 도쿄 사무실에 모여 TV를 봤는데, 이번에는 임원 4명만 남아 차 마시고 헤어져 버스 타고 집에 돌아왔어요. (니혼히단쿄는 꾸준히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거론돼 왔다.) 혼자 사니 무슨 반찬을 사갈까, 없으면 만들어 먹을까 생각하면서 집에 가는데 휴대전화가 울리더라고요.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됐다고. 집에 와서 TV를 켜니 히로시마에서 하는 기자회견 생중계가 나오더라고요.”
―수상을 실감하십니까.
―어떻게 원폭을 경험하셨습니까.
“79년 전이네요. 13세, 중1 때였습니다. 중학생이면 그래도 세상 보는 눈이 좀 어른스럽잖아요. 너무도 기막힌 기억이라 지금도 생생합니다.”
다나카 대표는 만주, 지금의 중국 선양(瀋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본군 출신. 옛 일제가 세운 괴뢰국 만주국 관료를 지냈다. 5세 때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어머니는 그를 포함한 아이 넷을 데리고 고향인 나가사키로 돌아왔다. 아버지를 좋은 분으로 기억했던 소년 다나카의 꿈은 군인이었다.
―원폭 공격 전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원폭이 투하되던 날의 기억을 들려주세요.
“1945년 8월 9일이었어요. 오전 8시부터 공습경보가 있었어요. 경보가 울리면 방공호로 대피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정말인가’ 싶었는데 1시간쯤 있다가 해제되더라고요. 정찰기가 지나가나 싶어 잠깐 창밖으로 하늘을 쳐다봤는데 구름이 끼어 잘 안 보였습니다. 방으로 돌아오는데, 순간 세상이 새하얗게 변했어요. 카메라 플래시가 터질 때 눈을 갖다 대면 그런 느낌일 겁니다. 2층집이었는데 본능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해 1층으로 뛰어 내려가 엎드려 눈을 감고 귀를 막았어요. 그리고 의식을 잃었죠.”
그의 집은 원폭이 투하된 폭심지에서 3.2km 떨어져 있었다. 그는 가벼운 화상만 입고 살았지만 나가사키 도시 전체가 불타면서 대낮에도 하늘이 새카맸다. 길에는 잿더미가 된 수백 구의 시체가 뒹굴었다. “앞만 보고 걷거라.” 친척을 찾으러 길을 나선 어머니는 당부했다. 할머니, 고모, 사촌 등 친척 5명이 원폭으로 숨졌다. 1945년 말까지 나가사키에서 7만4000여 명이 사망했다.
● “참상 본다면 누구도 핵무기 쓸 수 없어”
지울 수 없는 참혹한 기억은 그를 원폭 피해자 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1954년 미국의 태평양 비키니섬 수소폭탄 실험으로 일본 참치 어선 근로자가 피폭당하고 방사능 물질에 오염된 참치가 대량 폐기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시작된 원폭 수소폭탄 금지 운동으로 1956년 니혼히단쿄가 결성됐다. 그해 대학 1학년이었던 그는 여름방학에 나가사키로 돌아가 원폭 금지 대회에 참가했고 히단쿄 활동을 시작했다.
―피해자 활동에 어떻게 참가하게 됐나요.
“전후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연합군) 점령 7년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해서도 안 됐습니다. 주권을 회복했지만 일본 정부는 어떻게 도시를 부흥시킬지만 생각했지, 피폭자는 염두에 두지 않았어요. 피해 보상도 없었고 그대로 버려진 겁니다. 그러던 중 비키니섬 실험이 벌어져 운동을 시작했죠.”
―배상 요구를 넘어 원폭 반대 운동에 집중하셨습니다.
“당연히 피폭자들은 병원비를 정부가 부담했으면 했죠. 하지만 비키니섬 실험으로 원폭 반대 서명 운동이 커졌습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침묵해야 했던 피폭자들이 말을 할 수 있게 됐잖아요. 어떻게든 원폭 실험을 그만두게 하고 싶었던 거죠. 그렇게 핵무기를 없애자는 운동과 피폭자를 구제해 달라는 운동을 함께 했습니다.”
니혼히단쿄의 68년 역사는 글로벌 핵무기 반대 운동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피해자들의 요구에 일본 정부는 1957년 ‘원폭 의료법’을 제정해 피폭자 치료비를 국가가 부담했다. 1977년 한국인 손진두 씨가 제기한 ‘외국인에게도 피폭자 건강수첩을 교부해 달라’는 소송을 지원해 일본 대법원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유엔 군축 특별총회를 비롯한 다양한 국제 회의에 참가하며 세계적인 여론 조성에 앞장섰다. 세계 53개국이 서명하며 2017년 유엔에서 채택된 ‘핵무기 금지조약’은 니혼히단쿄 운동의 결실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니혼히단쿄의 핵무기 반대 운동은 최근 주목도가 더 높아졌다. 지난해 5월 히로시마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끝난 뒤 이들은 “핵 억지가 아니라 핵무기 근절에 나서야 한다”며 비판 목소리를 높였다. 다나카 대표는 올 7월 나가사키에서 열린 국제 평화 심포지엄에서 “핵무기가 비인도적이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비인도적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우리는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피폭의 고통은 어느 정도인가요.
“정말 말로 설명할 수가 없을 만큼 비참하고 끔찍합니다. 방사선은 눈에 보이지 않잖아요. 자신이 어떻게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죽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피폭의 고통을 직접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참상을 보면 누구라도 그런 폭탄을 쓰면 안 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피폭자들에게 핵무기란 무엇입니까.
“절대로 사용해선 안 되는 비인도적 무기입니다. 그런 무기는 가져서도 안 된다고 우리는 주장합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건 우리의 그런 주장이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세계인들이 공유하지 않으면 인류는 파멸할 거예요. 누군가가 스위치를 잘못 누르지 않는다고 할 수 없어요.”
―하지만 북한, 러시아 등의 핵 사용을 억제하기 위해 핵무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게 현실입니다.
“지금 국제정치의 주류죠. 하지만 그런 생각은 말도 안 된다고 저희는 얘기합니다. 핵을 가진다는 것은 쓰겠다는 거잖아요. 핵무기를 쓰면 어떻게 되는지는 우리가 가장 잘 압니다. 안 쓸 거면 필요 없잖아요.”
―그런 생각은 이상주의 아닐까요.
“맞아요, 이상주의. 하지만 핵으로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주의입니다. 핵으로 지킬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요.”
―일본이 원폭 피해만 강조하고 전쟁 책임을 외면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특히 한국인들은 여러 감정이 교차합니다.
“(피해만 강조하는 자세) 그런 게 있지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예전에 침략해 한국을 (일본과)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그런 것에 대한 반성을 근본적으로 해야죠. 사죄의 자세를 보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은) 일본인 중에서도 한국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늘었고, 한국 젊은이들도 일본 문화를 좋아한다고 하니 예전에 비하면 나을 것 같아요.”
노벨 평화상 수상이 결정된 11일, 니혼히단쿄 멤버들은 히로시마의 고교생 평화대사들과 함께 수상 장면을 생중계로 보며 기자회견도 함께 했다. 1998년부터 매년 일본 전 지역에서 뽑히는 고교생 20여 명이 니혼히단쿄 등과 함께 유엔 연설, 전국 평화 서명 운동 등을 한다. 피폭자는 줄어들고 있지만, 젊은 세대들이 뒤를 이으며 왕성한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니혼히단쿄 자체적으로도 젊은 세대의 참여를 활성화시키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로 여기고 있으며 이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노벨 평화상 시상대에 서시겠죠.
“누가 연설할지는 정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있지만, 피폭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체험을 전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다시는 피폭자가 생겨나선 안 됩니다. 또 한 번 핵무기를 사용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합니다.”
다나카 데루미(田中熙巳) 니혼히단쿄 대표위원△1932년 만주(현 중국 선양시) 출생
△1938년 아버지 사망 후 일본 나가사키로 이주
△1945년 나가사키 원폭 경험
△도쿄이과대 물리학과, 도호쿠대 대학원 박사
△도호쿠대 공학부 연구원
△니혼히단쿄 사무국장, 대표위원
△유엔 핵확산방지조약(NPT) 회의 등에서 다수 연설
△2024년 니혼히단쿄 노벨 평화상 수상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