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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의사수 논의’ 모범 네덜란드, 정부 개입 없었다

입력 | 2024-10-21 03:00:00

[의정갈등 해법, 해외서 길을 묻다]
의학-교육-데이터 전문가 등 100여명… 3년마다 정부에 필요 의사수 제언
정부-의사 모두 ‘중립적 결과’ 존중
韓 2000명 정한뒤 “논의”… 의사 반발



8일(현지 시간) 오전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시 ‘의료인력수급추계기구(ACMMP)’ 회의실에서 사무국 직원들이 정기 회의를 열고 있다. 위트레흐트=박경민 기자 mean@donga.com


“현재 의사들이 얼마나 활동하는지 잘 보여 주는 게 중요합니다.”

8일(현지 시간) 오전 네덜란드 중부 위트레흐트시. 의료인력수급추계기구(ACMMP) 회의실에 키스카 욜데르스마 사무국장 등 직원 10명이 캐주얼 복장으로 둘러앉았다. 이들은 동아일보 기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내년에 펴낼 인포그래픽 보고서 내용을 논의했다. 격주로 진행되는 정기 회의인데 정부 측 인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ACMMP는 의료 분야 79개 직종의 적정 인력 수를 3년마다 정부에 제언하는 기구다. 정부 예산으로 운영되지만 정부는 운영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사무국은 의사 2명을 포함해 수학, 교육, 데이터 등 다양한 분야의 민간 전문가 15명으로 구성돼 있다. 교육 전문가 엘런 당커르스더 마리 씨는 “정부에서 개입하지 않는 게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의사 등 직종 종사자들이 중립성을 인정하고 추계 결과를 존중한다”고 했다.

네덜란드의 ACMMP는 유럽에서 의료인력 추계 시스템을 운영하는 19개국 협의체를 주도할 정도로 선진적 모델로 인정받는다. 사무국 직원들은 의사, 간호사 등 직종 분과로 나뉘어 전문가 100여 명과 추계 작업을 진행한다. 총 50가지 변수를 활용하는데 3년 주기 중 2년 이상을 데이터 수집에 할애한다. ‘오래 계획하고, 자주 추계한다’는 것이 사무국의 모토다. 중립성과 객관성을 인정받아 정부와 의사 모두 결과를 존중한다.

일본의 의사수급분과회 역시 후생노동성 산하에 있지만 정부는 논의 과정에 참여하지 않는다.

네덜란드나 일본과 달리 한국은 의사 수 추계 기관이 없다. 의료 공백 직전 정부와 대한의사협회(의협)가 1년간 28차례 만났지만 결론을 못 냈고 결국 정부가 ‘의대 2000명 증원’을 결정했다. 최근에야 네덜란드와 일본 모델을 벤치마킹해 추계위원회 구성을 발표했지만 이미 신뢰가 사라진 의사들은 ‘들러리만 설 것’이라며 참여를 거부 중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선진국의 의사 추계 및 양성 시스템을 통해 의료 공백의 해법을 찾고자 네덜란드, 캐나다, 미국, 일본 등 4개국을 취재하고 전문가 50여 명을 만났다. 이들 국가는 방식은 다르지만 한국 같은 의정 갈등 없이 필수·지방 의료를 살리기 위해 필요한 만큼 의사를 양성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네덜란드, 의사 수 3년마다 추계… 데이터 수집에만 2년 쏟아


〈1〉 ‘의사 수 논의’ 모범 네덜란드
팬데믹 가능성-의료기술 발전 등… 50가지 변수 고려해 정원 산출
정부, 지원만 하고 간섭은 안해… “기관 독립성-자료 객관성 가장 중요”
“의사 등 의료인력을 추계할 때는 최대한 다양한 변수를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총 50가지 변수를 사용해 추계를 진행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의료인력수급추계기구(ACMMP) 사무국에서 일하는 통계학자 이베터 판 노르던 씨는 의료인력 추계 과정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그는 “다양한 데이터가 있어야 ‘고령화로 의료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단순한 추론 대신 ‘12년 후 어느 지역, 어느 과에 의사 부족이 예상된다’는 것까지 분석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ACMMP 사무국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기관의 독립성’과 ‘데이터의 객관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래야 추계 결과에 대해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의사, 간호사 단체 등이 모두 납득할 수 있고 정부 정책에도 이견 없이 반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추계 주기 중 3분의 2 이상을 데이터 수집에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정부 개입 없이 독립적으로 추계”

1990년대까지만 해도 네덜란드에는 별도의 의료인력 추계 기구가 없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는 각 대학이 자율적으로 정원을 결정했지만 지나치게 많이 뽑는 문제가 생겨 이후 정부에서 정원을 관리했다. 정부에선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을 선발하기 위해 추첨제 도입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1990년대 후반 이번에는 의사 공급 부족이 문제가 됐다. ACMMP에서 일하는 엘런 당커르스더 마리 씨는 “정부는 결국 의료인력 수는 전문가들이 모인 전문기관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해당 직종 종사자, 교육과 수련을 맡은 대학과 병원, 돈을 지급하는 건강보험사 등 세 기관이 모여 합의하는 방식을 고안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초기부터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ACMMP 이사회는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 전문가 집단, 대학과 병원, 건강보험사에서 9명씩 추천해 총 27명으로 이뤄진다. 그리고 지난해 기준으로 사무국 운영비 36억4600만 원은 모두 정부가 지원했다.

사무국에서 10개 분과 전문가들과 함께 진행하는 추계 작업 역시 정부 개입 없이 이뤄진다. 역시 독립기관인 보건의료서비스연구소(NIVEL)와의 교차 검증도 진행된다. 마리 씨는 “정부와의 관계는 국회에서 대정부질의를 할 때 요청이 오면 진행 상황을 공유하는 정도가 전부”라며 “추계 과정은 굉장히 투명하고 명백하게 이뤄진다”고 했다. 의대 2000명 증원이 어떻게 결정됐는지 아직까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한국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2022년 ACMMP는 보고서에서 현재 1만3492명인 주치의 수를 2027년까지 1190명(8.8%), 현재 2만5880명인 전문의 수를 1221명(4.7%) 늘려야 한다고 권고했고 정부는 받아들였다. 주치의는 한국으로 치면 1차 의료기관인 동네병원이다. 다만 의대 정원은 2850여 명으로 유지할 것을 권고했는데 이는 수련 대기 인원이 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22년 기준으로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한국이 2.6명, 네덜란드는 3.9명이었다. OECD 평균은 3.8명이다.

● “추계 위해 2년 이상 다양한 데이터 수집”

ACMMP는 의료인력 수급 추계를 할 때 총 50가지 변수를 활용한다. 변수에는 현재 활동 중인 의사 수와 향후 공급될 의사 수, 고령화 등 인구통계학적 변수는 물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같은 신규 전염병 발생 가능성, 기술의 발전 등도 포함된다.

하나의 변수에 대해 가능한 다양한 데이터를 수집해 교차 검증하기 때문에 3년 주기 활동 중 2년 이상이 데이터 수집에 소요된다. 이후 NIVEL과 함께 개발한 모델을 통해 추계를 진행한다. NIVEL 연구원 린다 플린테르만 씨는 “저희의 모델은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모델”이라며 “12년 후 공급과 수요를 일치시키겠다는 목표로 3가지 시나리오를 산정한다”고 설명했다. 12년은 의대에 입학한 학생이 실제 수련을 마치고 전문의 자격을 가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데이터에만 의존할 경우 빠질 수 있는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 ‘델파이 기법’도 적극 활용한다. 각 협회에서 추천한 전문가 7명으로 익명 패널을 구성해 질문과 답변을 반복하며 데이터를 보정하는 방식이다. 데이터 전문가 에흐버르트 클레버르스 씨는 “데이터로 추정이 어려운 사회문화적 변화, 기술 발전 동향 같은 변수에 대한 합의를 델파이 기법을 통해 이뤄내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의사들도 ACMMP의 독립성과 객관성을 인정하고 필요한 증원이라면 받아들인다. 아우키어 플라허 네덜란드 의사 노동조합 책임이사는 “네덜란드 의사들은 추계 결과에 대해 집단으로 반발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함께 추계해 왔기 때문에 잘했을 것이란 신뢰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본 기획물은 정부 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위트레흐트·나가사키=특별취재팀▽팀장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조유라 김소영 박경민 여근호(이상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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