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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바늘’ 양궁 국가대표 20년 “끝”…오진혁 “늦게 피었기에 오래 갔다”[이헌재의 인생홈런]

입력 | 2024-10-21 12:00:00


남자 양궁 레전드 오진혁이 33년간 정들었던 활을 놓는다. 오진혁은 그 어렵다는 양궁 국가대표 생활을 20년 동안 했다. 올림픽채널 인스타그램



시위를 떠난 화살은 아직 표적에 닿지 않았다. 그런데 시위를 놓자마자 그의 입에서는 “끝”이라는 한 마디가 나왔다. 찰나의 시간이 흐른 뒤 화살은 정확히 10점 과녁에 꽂혔다. 한국 남자 양궁 대표팀의 금메달을 확정 짓는 한 발이었다. 2021년 도쿄 올림픽 양궁 남자 단체전에서 나온 이 장면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끝”의 주인공 오진혁(43)이 영원할 것 같았던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한국 남자 양궁의 ‘맏형’ 오진혁은 지난달 말 경북 예천진호양궁장에서 열린 전국남녀양궁종합선수권대회에서 은퇴식을 갖고 33년간 정들었던 활을 내려놨다. 이날 그는 선수로는 뛰지 않고 행사에만 참석했다.

오진혁이 마지막으로 선수로 뛴 대회는 지난달 초 열린 제41회 회장기대학실업양궁대회다. 현대제철 유니폼을 입은 그는 후배 선수들과 함께 일반부 단체전에서 동메달을 합작했다. 개인전에서는 입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선수로서 마지막으로 쏜 화살을 정확히 10점 과녁에 명중시키며 양궁 인생의 “끝”을 그답게 장식했다.



오진혁(가운데)이 지난달 은퇴식에서 파리 올림픽 남녀 3관왕 김우진(왼쪽) 및 임시현과 기념 사진을 찍었다. 대한양궁협회 제공



후배들은 9월달까지만 해도 그를 “형”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10월부터 호칭이 “코치님”으로 바뀌었다. 전달까지 플레잉코치였지만 이달부터 본격적으로 코치직에 전념하고 있어서다.

지도자 데뷔전도 무난히 치렀다. 지난주 경남 진주 공군교육사령부에서 열린 전국제전에서 그가 이끈 제주(현대제철)는 남자 일반부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합작했다. 소속 선수 남유빈은 남자 일반부 개인전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오진혁은 “뒤에서 지켜보는데 선수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엄청난 긴장감을 느꼈다. 차라리 내가 나가서 활을 쏘는 게 훨씬 편하겠다 싶더라”며 “그래도 첫 대회부터 선수들이 잘 따라주고, 좋은 성적을 내줘서 너무 고맙다”며 웃었다.



오진혁의 경기 모습. 대한양궁협회 제공



오진혁은 오랜 선수 시절 동안 한국 양궁에 여러 기념비적인 기록을 남겼다. 2012년 런던 올림픽 개인전 금메달이 대표적이다.

올해 파리 올림픽에서 단체전 10연패를 달성한 여자 양궁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부터 개인전에서도 거의 금메달을 놓친 적이 없다. 하지만 남자 양궁 대표팀은 단체전에서는 강했지만 유독 개인전에만 들어가면 힘을 쓰지 못했다. 박성수(1988년 서울), 정해전(1992년 바르셀로나), 박경모(2008년 베이징) 등 쟁쟁한 선수들도 모두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한국 남자 선수 ‘은메달 징크스’를 처음 깨뜨린 게 바로 오진혁이다. 오진혁이 2012년 런던 대회 처음 금맥을 뚫자 구본찬이 2016년 리우 대회에서 뒤를 이었다. 올해 파리 대회에서는 절친한 후배 김우진이 숙원이던 개인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오진혁이 인천에 위치한 현대제철 훈련장에서 2012년 런던 올림픽과 2021년 도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당시의 활을 보여주고 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그보다 더 어려운 기록은 최장수 양궁 국가대표 기록이다. 흔히들 한국 양궁 국가대표 되기가 낙타가 바늘구멍 뚫기보다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오진혁은 그 어렵다는 한국 양궁 국가대표를 20년 동안 했다. 한국 엘리트 선수들의 요람인 태릉선수촌과 진천선수촌에서도 그만큼 오랫동안 머문 선수는 종목을 불문하기 거의 찾기 힘들다. 그는 “처음엔 멋모르고 덜컥 국가대표가 됐다가 다시 탈락하길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활을 이렇게 쏘면 되겠구나 하는 감이 왔다. 그 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정말 노력을 많이 했다”며 “한 번 떨어진 경험 때문인지 다시는 내려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주변에서도 ”잘한다, 잘한다“ 응원해 주니 더 열심히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대기만성형 선수였다. 18세이던 1998년 세계주니어선수권 2연패와 함께 반짝 떠오르며 태극마크를 달았지만 이듬해 곧바로 탈락했다. 간혹 8명의 대표 선수 안에 포함되긴 했지만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같은 큰 대회를 앞두고 열린 최종 선발전에서는 번번이 낙방했다. 그는 “국군체육부대(상무)를 다녀와서 어느 실업팀에서든 1, 2년 만 더 선수 생활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고 했다.

가능성을 본 대회는 2007년에 열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대표 선발전이었다. 박경모, 임동현, 이창환 등 쟁쟁한 선수들과 경쟁한 끝에 또 탈락했다. 그런데 예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뭔가 하면 될 것만 같았다.

하루 휴식도 없이 선발전 다음날부터 다시 활을 잡았다. 2008년 한 해 동안 그는 설날과 추석 등 딱 이틀을 쉬었다. 나머지 363일은 미친 듯이 활을 파고 들었다. ‘이렇게 쏘면 되는구나’ 하는 느낌이 딱 그때 왔다. 자신만의 루틴이 생긴 것이다.



지난달 선수에서 은퇴한 오진혁은 이달부터 본격적인 지도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헌재 기자



28살이던 200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다시 대표팀에 복귀한 그는 올해 은퇴하기 전까지 16년 연속 대표팀의 든든한 ‘맏형’으로 활동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개인전 금메달과 단체전 동메달을 땄고, 2021년 도쿄 대회에서는 후배들과 단체전 금메달을 합작했다. 또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부터 2014년 인천,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2023년 항정우 대회까지 네 대회 연속 출전해 금메달 3개를 땄다.

그는 “다시 대표팀에 복귀한 이후엔 당장 내일 경기를 해도 지장 없을 정도로 장비와 마음의 준비를 철저히 했다. 자신감이 생기면서 이후엔 매년 치르는 국가대표 선발전이 두렵지 않았다”며 “나이를 먹었다고 노력과 배우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좋은 후배들의 장점을 보면 배워서 내 걸로 만들어 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정작 오랫동안 그를 괴롭힌 건 부상이었다. 과도한 훈련 탓에 2011년부터 시위를 당길 때마다 오른쪽 어깨에서 뚝~ 하는 소리가 났다. 2017년 경에는 오른팔을 들어 올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정밀 검진 결과 어깨 회전근 4개 중 3개가 끊어져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당장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오진혁은 “마지막 한 개의 근육이 끊어질 때까지 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진통제를 먹어도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참고 쏘다 보니 언젠가부터 통증에 익숙해졌다. 이 정도는 아프거니 하고 쏘는 거다”라며 “가장 힘든 건 쉬었다 다시 쏠 때 찾아오는 통증이다. 그런데 또 쏘다 보면 익숙해지곤 했다”며 웃었다. 그렇게 그는 뒤늦게 찾아온 전성기를 오래오래 유지했다.



오진혁이 태국 전지훈련 중 휴식일에 낚시로 잡은 자이언트 메기를 들어보이고 있다. 오진혁 제공



하나밖에 남지 않은 어깨 근육을 지키기 위해 그는 보강 운동을 꾸준히 했다. 무게를 드는 웨이트 트레이닝 대신 밴드를 활용한 운동을 많이 했다. 부하가 상대적으로 적은 수영도 어깨 강화에 많이 도움이 됐다.

하체는 웨이트트레이닝과 함께 하루 40분 안팎의 유산소 운동으로 단련했다. 역시 몸에 크게 무리가 가지 않게 빠른 달리기보다는 트레드밀에서 빨리 걷거나 천천히 뛰었다. 피트니스센터에서 사이클도 종종 탔다.

젊은 시절 그는 탄산음료를 좋아했다. 너무 과하게 먹지 않느냐는 지적도 많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탄산음료 섭취를 줄이고 차를 많이 마신다. 육류 위주의 식사에서 야채나 과일 등을 많이 먹는 쪽으로 식성도 바꿨다.

승부 세계의 스트레스를 푼 방법 중 하나는 낚시다. 선수 생활의 후반기 대부분을 보낸 진천선수촌 생활을 할 때 휴일이면 팀 후배인 김종호와 함께 낚시를 다녔다. 그는 바다낚시보다는 민물낚시를 선호한다. 바다낚시는 하루종일 걸리기 일쑤인 반면 민물낚시는 잠깐 짬을 내서도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태국 등으로 전지훈련을 갈 때도 휴일이면 낚싯대를 빌려 인근 강에서 낚시를 즐기곤 했다. 그는 “잘하진 못해도 열심히 배우고 있다. 떡밥 개는 법, 채비 차리는 법 등을 알아 나가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오진혁은 낚시로 승부 세계의 스트레스를 푼다. 오진혁 제공



이제 본격적으로 지도자를 첫발을 내딛은 그는 자신이 양궁을 통해 느꼈던 성취감을 제자들도 함께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는 “첫 올림픽 무대를 밟았을 때는 마치 하체가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차츰 안정을 찾으면서 말할 수 없는 성취감을 느꼈다”며 “우리 선수들도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 등에서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게 도우려 한다”고 말했다.

장기적인 꿈은 선수촌장 직에 도전하는 것이다. 태릉과 진천에서 선수촌 밥을 20년이나 먹었기에 그만큼 선수들이 느끼는 고충을 많이 알고, 잘 해결해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20년간 세상도 많이 변했지만 선수들의 생각도 많이 변했다. 원활한 소통으로 선수들에게 다가가 선수들이 함께 목표를 이루고 싶은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