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서울284 ‘생명광시곡, 김병종’
옛 서울역은 80년 동안 서울의 관문으로 교통과 교류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2004년 KTX 신역사가 생기며 옛 서울역은 문을 닫았다. 그리고 2년여의 공사 끝에 2011년 ‘문화역서울284’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284는 옛 서울역의 사적(史蹟) 번호.
이 곳에서는 현재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원장 장동광)이 주최하는 ‘K판타지아 프로젝트’의 첫번째 기획전시회인 ‘생명광시곡, 김병종’이 10월24일까지 열리고 있다.
올해부터 매년 한번씩 열리는 ‘K판타지아 프로젝트’는 한류(K컬쳐)가 전세적으로 확산되는 시대를 맞아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특별기획. 첫 전시는 ‘화첩기행’으로 잘 알려진 작가 김병종(서울대 명예교수)의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아트 아카이브 형식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동양화에 뿌리를 둔 김 작가는 서양화, 미술과 문학 등 장르 간 경계가 없이 활동해온 통섭의 예술가다. 전시장에는 김 작가의 회화, 문학, 지필묵, 오브제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광시곡이 연주되듯 펼쳐진다.
풍죽 연작은 1,2등석 대합실에도 전시돼 있다. 김 작가는 연작을 그릴 때 화면을 분할해서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그리기 때문에, 공간의 특성에 맞게 적절하게 이어붙여 전시를 할 수 있다. 서울역의 대합실 공간에 맞게 각을 주어서 둘러싸게 만드니 더욱 대숲의 한 가운데 들어온 듯한 아늑함이 느껴진다.
김 작가는 전통적인 대나무 그림처럼 줄기와 가지는 그리지 않고 댓잎만 그렸다. 그래서 전통 수묵화의 댓잎이 추상화된 현대미술에 가까워졌다. 수많은 댓잎들이 이리저리 중첩된 모습을 보고 있으면 “솨~아”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림이 아니라 소리를 담고 싶어 그린 그림”이라는 해설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로비 옆 3등 대합실 공간에서는 ‘동심의 기억’ 전시가 이어진다. 황금빛 송홧가루(소나무의 꽃가루)가 온세상을 덮는 ‘송화분분(松花粉粉)’ 시리즈다. 작가의 고향인 지리산 자락의 남원에서는 봄철이면 송홧가루가 날려 온 산천이 노랗게 변하는 모습을 그린 환상적인 작품이다.
2악장 ‘덧없는 꽃’은 김병종 작가의 또다른 대표주제인 ‘화홍산수(花紅山水)’도를 전시하고 있다. 화홍산수란 ‘꽃(花)이 산하(山水)를 붉게 만든다’는 뜻이다. 동백인지, 장미인지 알 수 없는 붉은색 꽃잎은 원초적인 생명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다. 꽃잎의 중앙에는 검은색 먹물이 번져 깊은 심연을 이루고 있고, 꽃잎은 붉은색 방울을 흘리고 있다. 꽃의 관능적인 생명력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옛 서울역사의 복도에 화홍산수 그림이 전시돼 있다.
큰 붓질로 그린 선들은 이리 저리 얽히며 자라는 나무들이고, 거친 붓질은 솔잎을 표현했다. 그 사이로 새가 날아다니고, 나비가 날고, 들짐승이 숨어 있다. 무서운 밤의 숲 속에 숨어 있는 해학적인 짐승들의 모습은 우리 전통 민화를 연상케한다. 이 그림은 닥나무 섬유와 한약재 등을 섞어 만든 화면이 채 마르기 전에 큰 붓을 휘둘러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 붓의 움직임과 방향이 또렷하게 남아 있는 새로운 방식의 수묵화가 탄생했다.
지리산 자락 남원에서 태어난 김 작가에게 ‘숲’은 그의 유년기를 위로해 준 넉넉한 품이었다. 작가는 어릴 적 서늘하고 검은 숲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데, ‘12세의 자화상’은 특히 어두워 보인다. 1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슬픔과 외로움을 겪고 있던 소년이 숲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있는 모습이다.
2012년 작 상선약수(上善若水)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말이다. 이 작품도 골판지에 그렸다.
전시장에는 작가의 붓과 벼루, 도장, 한지, 달항아리, 원고지 등도 전시돼 있다.
김병종 화백이 그린 ‘서울역으로 가는 야간열차의 추억’. 야간열차를 탄 승객들의 고단한 삶이 그대로 느껴진다.
한층 올라가면 마지막 4악장이 펼쳐진다. 1990년대 말부터 연재한 문학과 미술의 대장정인 ‘화첩기행’ ‘시화기행’에 담긴 삽화 80여 점과 글이 전시돼 있다.
김 화백의 ‘화첩기행’은 단순한 풍경을 넘어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표정까지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전시의 마지막 순서에는 김병종 작가의 대표작인 ‘바보예수(Jesus, the Fool)’ 연작이 나온다. 1980년대 후반 이 작품이 발표됐을 때 국내에서는 ‘신성모독’이라고 종교계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독일, 프랑스 등 해외에서 오히려 큰 반향을 일으켜서 호응을 얻었던 작품이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도 스스로를 ‘바보’라고 칭하고, 자신의 자화상 그림에 ‘바보야’라고 쓰기도 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