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과학자의 누룩 주정 제조법… 스카치위스키와 맛-향 차별화
전통 재해석한 새 장르 개척
박사 뜻 이어 설립한 ‘신도증류소’… 일본식 환대-장인 정신 체험 공간
‘효모 X’ 로 독자적인 위스키 생산
리켄과 타카미네 위스키일본에는 리켄(RIKEN, 理硏), 정식 명칭은 이화학연구소라는 종합 연구기관이 있다. 20세기 초 일본 최고의 과학자였던 다카미네 조키치의 발의로 설립됐고 노벨상 수상자도 여럿 배출한 곳이다. 아드레날린의 발견자로 유명한 설립자인 다카미네는 기업인으로도 성공해 최근 1만 엔 신권의 모델이 된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함께 도쿄비료회사를 설립했다. 그곳에서 인산의 인공 합성에 성공했고 미국 가정의 상비약이었던 다카디아스타제라는 소화제도 출시했다. 현대로 치면 잘나가는 바이오벤처 기업가인 셈이다. 그는 누룩을 활용한 새로운 주정 제조법으로 특허를 받아 미국의 ‘위스키트러스트’사와 함께 새로운 위스키 제조 프로세스를 시도했으나 이로 인해 일자리를 잃을까 걱정한 미국 노동자들의 방해로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동양의 누룩은 훨씬 더 당화와 발효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한다. 미국은 프로세스의 혁신을 통해서 스카치위스키를 추월할 좋은 기회를 이때 잃은 셈이다.
몇 년 전 규슈의 유서 깊은 시노자키주조에서 이 누룩을 사용해 만들고 오크통에 숙성한 위스키를 ‘타카미네’란 이름으로 출시했다. 법적인 제약으로 일본이 아닌 미국에서만 출시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누룩을 사용한 증류주는 위스키로 분류되지 않으며 오크통의 영향으로 호박색으로 색이 바뀐 소주는 일본 소주로도 분류되지 않는다. 이런 양쪽의 난관을 뚫고 시노자키주조의 젊은 후계자가 ‘타카미네 누룩 위스키’라는 이름으로 미국 시장에 선보인 것이다. 다카미네 박사가 원래 진출하려 했던 미국 시장을 100년 후 또 다른 일본인이 그의 이름으로 만들어서 진출한 셈이다. 출시한 지 좀 돼 귀해진 타카미네 위스키는 그의 팬으로서 한 잔 맛보고 싶었으나 시중에서 찾기 어려웠다. 뜻밖에 지난겨울 워싱턴DC의 피셔맨스워프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반가운 나는 8년 저숙성 위스키로는 꽤나 비싼 가격인 150달러임에도 망설임 없이 지갑을 열었다.
인연으로 떠난 신도증류소작년 가을 오키나와 위스키 행사에서 만난 일본 증류소 관계자들에게 한국의 위스키 최고위 과정을 수료한 이들과 함께 일본 위스키 증류소를 방문하고 싶다고 부탁했더니 꽤 많은 수의 증류소가 흔쾌히 허락해줬다. 그중 하나인 시노자키주조에 방문하게 됐다.
규슈의 시노자키주조는 아사쿠라 소주로도 유명한데 이곳의 8대 사장인 시노자키는 꽤 젊다. 10여 년 전 가업을 물려받아 이 일을 시작했고 아버지가 만들어 둔 원주를 타카미네 누룩 위스키로 되살리기도 했지만 그가 존경하는 다카미네 박사의 방식으로 완전히 자신만의 새로운 위스키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마침내 새로운 길이란 뜻의 신도증류소를 설립했다. 아직은 달랑 건물 한 동과 숙성 창고뿐이지만 내가 본 그들은 새로운 길로 나아가 별이 되겠다는 의지를 표방한 그들의 로고처럼 단단하기에 그들의 노력도 곧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증류소를 돌아보던 중 커다란 냉장고 앞에 섰는데 이곳이 그들의 자랑인 ‘효모 X’가 보관된 곳이라고 한다. 냄새를 맡아 보니 희미한 과실 향이 났다. 효모는 별도의 배양을 거쳐 발효에 사용한다. 시노자키는 100년 전 디카미네의 방식을 21세기형으로 발전시켜 위스키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신도증류소 위스키의 뉴스피릿은 마치 누룩으로 만든 안동소주처럼 달고 감칠맛이 있다. 오크통 숙성과는 또 다른 신선한 감칠맛이다. 우리는 그윽한 맛과 향에 감탄하며 시음주를 마신 후 앞으로 제대로 숙성을 거쳐 정말 훌륭한 위스키를 기대한다는 진심 어린 덕담도 했다. 하지만 얼추 3년이 다 돼 가는 원액임에도 시노자키 사장은 여전히 말을 흐린다. 아마도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맛이 나오지 않아 출시를 고민하는 것 같다. 일본에서는 사실 위스키 숙성 연수의 법적 제약은 없어 몇 달 혹은 1년 정도 숙성시킨 위스키들이 많이 출시됐지만 3년이 다 됐는데도 출시를 고민하는 그와 직원들의 장인정신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반나절 동안 신도증류소의 일본식 환대, 즉 오모테나시가 넘치는 견학 프로그램을 마치고 다 함께 건배와 기념 촬영을 했다. 시노자키 사장은 막 오픈해 여러모로 준비가 미흡한데 멀리서 찾아왔다며 견학 비용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은 간단한 선물을 건넸다. 그들은 우리가 떠나간 그 자리에서 우리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불쑥 찾아간 이방인에 대한 따뜻한 환대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신도증류소 방문을 통해 젊은 사장의 도전을 가까이에서 봤고, 잔잔하게 울림을 주는 일본의 오모테나시도 체험했다. 단지 술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술을 매개로 국적과 세대와 역사를 뛰어넘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다른 부연이 필요치 않을 것이란 말이 뇌리에 박히게 된 여행이었다.
신도증류소의 장인 정신과 그들의 새로운 시도에 감동했지만 다카미네 방식의 위스키가 무조건 더 좋다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전통적 방식으로 만든 스카치위스키를 더 좋아한다. 세상의 모든 위스키는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고 있기에 다카미네 방식의 위스키도 그중 하나일 뿐이다. 언젠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타카미네 위스키를 함께 마실 이들에게 신도증류소의 장인정신과 도전 정신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박병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