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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부서진 영혼을 건져올리는 투명한 언어들

입력 | 2024-10-25 03:00:00

[한강 문학 속으로]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작가의 유일한 시집으로 상실-슬픔 등 영혼의 균열 다뤄
단호한 목소리로 고통과 정면 승부해 회복하는 모습 노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문학과지성사, 2013)는 영혼의 부서짐을 예민하게 감지한다는 평을 받는 소설가이자 시인 한강의 유일한 시집이다. 1993년 계간 ‘문학과사회’ 겨울 호에 시가 실리고 이듬해 서울신문에 단편이 당선돼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한 한강은 소설가이기 전에 시인이었다. 작가가 8권의 소설을 내는 동안 틈틈이 쓰고 고른 시 60편을 추려 시집으로 묶었다.

한강의 시집은 ‘저녁의 소묘’ ‘새벽에 들은 노래’ ‘피 흐르는 눈’ ‘거울 저편의 겨울’ 등 연작들의 제목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그 정조가 충분히 감지된다. 어둠과 침묵 속에서 더욱 분명해지는 존재와 언어를 투명하게 대면하는 목소리로 가득하다. “고통과 절망의 응시 속에서 반짝이는 깨어 있는 언어-영혼”(문학평론가 조연정)을 발견해가는 환희와 경이의 순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며 노벨 문학상 선정 사유를 밝힌 스웨덴 한림원의 평가는 의미 있다. 한강은 인간 삶의 고독과 비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맞닥뜨리는 진실을 특유의 단단하고 시정 어린 문체로 새겨왔다.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그간 한강 문학을 이야기할 때 맨 먼저 언급돼온 강렬한 이미지와 감각적인 문장들 너머에 자리한 내밀한 기원에 한발 가까이 다가가는 주춧돌 역할을 해준다.

시집에는 늦은 오후와 한밤, 한밤과 여명이 교차되는 저녁이나 새벽 시간을 배경으로 한 시들이 유난히 많다.

“이 어스름한 저녁을 열고/세상의 뒤편으로 들어가 보면/모든 것이/등을 돌리고 있다//고요히 등을 돌린 뒷모습들이/차라리 나에겐 견딜 만해서” (‘피 흐르는 눈 4’ 중에서)

사물의 윤곽이 흐릿하고 마음의 경계가 느슨해진 시간, 시인은 실체를 알 수 없는 근원적인 상실과 슬픔, 영혼의 균열에 대해 노래한다. “아직 심장도 뛰지 않는/점 하나로/언어를 모르고/빛도 모르고/눈물도 모르며/연붉은 자궁 속”에서 “죽음과 생명 사이,/벌어진 틈”(‘마크 로스코와 나’ 중에서)을 좇는다. 거기에는 ‘영혼의 피 냄새’가 가득하다.

“한 사람의 영혼을 갈라서/안을 보여준다면 이런 것이겠지/그래서/피 냄새가 나는 것이다/붓 대신 스펀지로 발라/영원히 번져가는 물감 속에서/고요히 붉은/영혼의 피 냄새//이렇게 멎는다/기억이/예감이/나침반이/내가/나라는 것도”(‘마크 로스코와 나 2’ 중에서)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일상적 삶에 안착하지 못하고 고통받는 주인공들의 독백으로 읽히는 시도 적지 않다. 한강은 더 많은 눈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 몸을 ‘텅 빈 항아리’로 만들기도 한다. 시대의 모든 아픔이 그의 몸으로 파고든다.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선 채로 기다렸어, 그득 차오르기를//(중략)//누군가 내 몸을 두드렸다면 놀랐을 거야/누군가 귀 기울였다면 놀랐을 거야/검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깊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둥글게/더 둥글게/파문이 번졌을 테니까//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알 수 없었어, 더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니”(‘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중에서)

육체가 마르고 텅 비어 가는데 영혼이 온전할 리 없다. 결국 영혼도 부서진다.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과 균열의 느낌은 어김없이 찾아든다. 하지만 한강은 단순히 아픔을 품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간다. 오히려 “그렇게 부서지고도”(‘피흐르는눈3’ 중에서) 살아 있음을, 고통과 대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면을 보며 발을 구를 것/발목이 흔들리거나, 부러지거나/리듬이 흩어지거나, 부스러지거나//얼굴은 정면을 향할 것/두 눈은 이글거릴 것/마주 볼 수 없는 걸 똑바로 쏘아볼 것/그러니까 태양 또는 죽음,/공포 또는 슬픔//그것을 이길 수만 있다면/심장에 바람을 넣고/미끄러질 것, 비스듬히” (‘거울 저편의 겨울 9―탱고 극장의 플라멩코’ 중에서)

한강은 상실감과 슬픔에 압도당하는 대신 고통과의 정면 승부를 택한다. 스스로에게 재우쳐 다짐하듯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한 그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단호하다. 시인이 20대에 쓴 시들이 주로 수록된 시집의 5부(‘캄캄한 불빛의 집’)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벅찬 숨결, 더운 핏줄, 열정적 사랑, 푸릇한 청춘의 시절을 통과해왔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살아라, 살아서/살아 있음을 말하라/나는 귀를 막았지만/귀로 들리는 음성이 아니었다 귀로/막을 수 있는 노래가/아니었다”(‘유월’ 중에서)

시인이 닿고자 하는 것은 결국 순수한 언어, 삶의 본질, 고통과 절망 너머의 어떤 절실함과 회복의 풍경들과 맞닿아 있다.

“이제/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물으며 누워 있을 때/얼굴에/햇빛이 내렸다//빛이 지나갈 때까지/눈을 감고 있었다/가만히” (‘회복기의 노래’ 중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적 고통을 응시하면서도 그 속에서 소생의 길을 탐색하는 이 시집은 소설가 한강이 그간의 작품 활동을 통해 추구했던 본질로 향하는 열쇠와 같다. 출판사 측은 “무엇 때문에 태어나 왜 서로 죽고 죽이며 죽어 가는지, 누구나 한 번 품어봤지만 풀리지 않아 잊어버린 질문을 한강은 수십 년 붙들고 글을 써왔다”며 “(이 시집은) 인간과 인간됨에 대해 끝없는 질문의 궤적을 그리는 한강의 ‘나이테’”라고 소개했다. 사랑과 상실의 감정들을 노래한 전통적인 미학의 서정시들이 다수 수록돼 있는 만큼 한강 작품을 처음 접하는 이들이 입문서로 택하기에도 좋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