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문학 속으로] 소설집 ‘여수의 사랑’ 1994년 출간 첫 소설집… ‘삶의 고단함’ 주제 단편 6편 표제작 ‘여수의 사랑’, 아픈 운명과 대면하는 인물 그려
다른 주인공 ‘정선’은 다섯 살 무렵 어머니를 여의고 2년 뒤엔 아버지에 의해 동반 자살을 당하다 겨우 살아남았다. 함께 지내던 동생은 아버지와 함께 숨을 거둔다. 그 끔찍한 일이 벌어졌던 곳이 바로 여수. 정선에게 여수는 쓰라린 기억과 구역질 나는 바다 냄새와 생선 썩는 냄새가 가득한 곳일 뿐이다.
저마다의 아픔을 안고 서울에서 만난 두 사람은 우연히 한 집에 머물게 된다. 하지만 서로의 상처를 보듬거나 차이를 극복하진 못하고 자흔은 훌쩍 떠나 버린다. 그곳은 아마도 여수일 것이다. 정선은 자신에게도 사무치게 고통스러운 기억이 서린 여수로 그녀를 찾아 나선다. 이렇게 상처 입은 자들이 다시 여수로 모여든다.
소설 ‘여수의 사랑’은 주인공들이 아픔과 치욕을 헤집고 고통스러운 운명과 마주하는 작품이다. 이들은 그토록 피하고 싶던 여수로 운명처럼 다시 끌려간다. 소설에서 자흔은 “어디로 가든, 난 그곳으로 가는 거”라고 말하고 훌쩍 떠난다.
“그들은 정말 여수를 사랑하는가? 사랑한다, 분명히. 그곳이 그들의 고향이고, 그곳에서야말로 친숙하고 따뜻하고, 외롭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피하고 싶으면서도 사실은 그곳을 사랑하고 있다는 역설적인 묘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주인공들에게 여수는 두려움과 아픔을 점지하는 곳이자, 지치고 외로운 영혼이 안타깝게 부르는 마음의 자리로 읽힌다. 또한 끝내 이룰 수 없다는 걸 분명히 알기 때문에 늘 간절한 소망으로 새기는 대상이기도 하다.
“여수, 그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어대고 있을 것이다. 여수만(灣)의 서늘한 해류는 멍든 속살 같은 푸릇푸릇한 섬들과 몸 섞으며 굽이돌고 있을 것이다. 저무는 선착장마다 주황빛 알전구들이 밝혀질 것이다. 부두 가건물 사이로 검붉은 노을이 타오를 것이다. 찝찔한 바닷바람은 격렬하게 우산을 까뒤집고 여자들의 치마를, 머리카락을 허공으로 솟구치게 할 것이다.”
문학과지성사 상임고문인 김병익 문학평론가는 당시 소설의 초판 해설에서 “그녀는 왜 삶의 치욕들을 헤집고 그들의 고통스런 운명을 잔인하게 우리 앞에 던져주는가”라고 묻는다. 한 작가는 결국 작품을 통해 자신은 물론 독자인 우리가 모두 버리고 지웠던 기억을 되살리는 지난한 시간을 겪게 한다. 돌아보면 그 시간은 ‘인간’이라는 상처를 안고 살아온 아픈 시간을 깨우는 뼈아픈 각성의 시간이 된다. 내가 버렸던 아픈 기억들을 들추는 것이 달갑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막막했던 당시의 기억은 힘든 시간을 견뎌낸 우리 모두에게 다시 살아갈 동력을 전해준다.
표제작을 비롯해 소설집에 담긴 다른 작품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꼽자면 ‘삶의 고단함’이다. 한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첫 단편집을 쓰던 당시 “고단함에 관심이 있었다. 인간이 어떻게 삶을 버티고 떠나기를 몰래 꿈꾸고, 저마다 홀로 피로와 시련을 감당해 내는지가 관심사였다”고도 설명했다. 그 때문에 작품 속 인물들은 떠나고, 버리고, 방황하고, 추락하며 죽음 가까이에서 이 세상에 없는 것들을 그리워한다. 또 상실감과 파괴적인 체념을 담고 있으며 눅눅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
소설 ‘질주’에서 형 인규는 집단 폭행으로 죽어간 동생 진규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 인규는 아버지의 죽음 후 의붓아버지와 사는 어머니가 동생 진규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머니가 자궁암에 걸린 뒤 수술을 거부하는데 이는 다시 동생 진규를 낳고 싶기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너를 낳고 싶구나. 나에게 돌아오겠느냐?”
‘진달래 능선’은 백치 같은 여동생을 버리고 어린 시절 고향에서 도망친 주인공 정환이 훗날 고향에 들러 어머니와 동생의 소식을 듣고 이들을 찾아다닌다는 줄거리다. 고향,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귀환 등을 주제로 담고 있다. ‘어둠의 사육제’는 집과 고향을 버리고 상경해 자신을 찾으려 애쓰는 장녀 영진의 이야기다. 한 작가가 신춘문예로 등단한 ‘붉은 닻’은 죽음을 앞둔 동식과 군 제대 후에도 가족에 대한 배려 없이 함부로 살아가는 동영에 대한 이야기다. 개인이 안고 있는 상처와 이를 극복해나가는 희망을 그렸다.
강계숙 문학평론가는 소설집 ‘여수의 사랑’에 대해 “시간의 풍화작용에도 그 빛을 잃지 않고 튼튼히 살아남을 것임을 확신한다”며 “우리 시대의 가장 젊은 ‘고전(古典)’이라고 평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