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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흰 것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묻다

입력 | 2024-10-25 03:00:00

[한강 문학 속으로] 장편소설 ‘흰’
언어를 통해 상처-고통 초월하려는 소망 담아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 후보작에 오르기도




페인트가 벗겨지고 칠이 벗겨진 자리마다 녹이 슨 문. ‘301호’임을 가리키는 숫자를 송곳으로 아무렇게나 긁어 표시했으며 방에는 크고 작은 얼룩이 졌고 스위치 주변은 까만 자국이 가득하다. 이 집에 살기로 계약하고 들어선 주인공은 흰 페인트와 평붓을 들고 더러운 곳들을 칠하기 시작한다. ‘얼룩이 지더라도 흰 얼룩이 더러운 얼룩보단 낫겠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상처투성이인 문, 핏자국 같은 녹물, 송곳으로 아무렇게나 그은 숫자들을 흰색으로 칠해버리는 장면으로 이 소설은 시작한다.

그다음에는 ‘눈처럼 하얀 강보에 꼭꼭 싸인 아기’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 아기는 내 어머니가 낳은 첫아기. 달떡처럼 얼굴이 흰 여자아이였고 몸이 아주 작았지만 눈, 코, 입이 또렷하고 예뻤다. 까만 눈을 뜨고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기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 아기가 세상에 나와 살아 있는 시간 동안 들은 유일한 음성은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이라고 속삭이는 엄마의 목소리였다. 주인공은 그 아이가 때로 나의 삶에도 찾아왔는지 떠올려 본다.

“그이가 나에게 때로 찾아왔었는지. 잠시 내 이마와 눈언저리에 머물렀었는지. 어린 시절 내가 느낀 어떤 감각과 막연한 감정 가운데, 모르는 사이 그이로부터 건너온 것들이 있었는지. 어둑한 방에 누워 추위를 느끼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니까.”

주인공은 누군가가 한 ‘어릴 때 슬픔과 가까워지는 어떤 경험을 했느냐’는 질문에 아기의 죽음을 떠올린다. “어린 짐승들 중에서도 가장 무력한 짐승.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 그이가 죽은 자리에 내가 태어나 자랐다는 이야기.” 이 말은 더 적나라하게 옮긴다면 그 아이가 죽었기 때문에 내가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누군가의 죽음 덕분에 가능했던 삶에 관한 이야기는 주인공이 한국을 벗어나 지구 반대편의 오래된 도시로 옮겨오면서 더 넓은 차원으로 확대된다. 이 도시는 주인공의 말로 유추했을 때 폴란드 바르샤바로 추정된다. 자신의 책을 옮긴 번역자의 초청으로 휴가 기간 동안 바르샤바에 오게 된 주인공은 우연히 1945년 봄 미군 항공기가 촬영한 도시의 영상을 보게 된다. 흰 눈에 뒤덮인 줄 알았던 도시의 사진은 가까이 가니 산산이 부서져 폐허가 된 모습이다. “유럽에서 유일하게 나치에 저항하며 봉기를 일으켰던 이 도시를 (중략)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깨끗이, 본보기로서 쓸어버리라”는 히틀러의 명령 아래 이 도시는 완벽하게 무너지고 부서졌다. 이곳에서 주인공은 이 도시와 비슷한 어떤 사람, 죽은 아기의 얼굴을 곰곰이 생각하기에 이른다. 나치에 죽음으로 저항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지금의 세계는 연약한 아이가 죽었기에 태어난 어느 사람의 삶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이 도시에서 주인공은 상처 위에 ‘흰’ 페인트를 칠하며 치유를 시도한다. 그러나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가 칠하는 ‘흰’은 상처를 안 보이게 덮는 것이 아닌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 덮을 흰 거즈 같은 것이다. 상처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지만 더러운 얼룩보다는 그나마 나은 흰 얼룩. 그런 ‘흰 것’에 대한 단상을 이어가며 주인공은 죽은 아기에게 잠시나마 자신의 삶을 빌려주고자 한다.

그렇게 주인공이 써 내려간 ‘흰 것’은 총 65개의 짧은 챕터로 구성된다. 강보, 배내옷, 달떡, 안개, 흰 도시, 젖, 초, 성에, 서리, 각설탕, 흰 돌, 흰 뼈, 백발, 구름, 백열전구, 백야,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흰나비, 쌀과 밥, 수의, 소복, 연기, 아랫니, 눈, 눈송이들, 만년설, 파도, 진눈깨비, 흰 개, 눈보라, 재, 소금, 달, 레이스 커튼, 입김, 흰 새들, 손수건, 은하수, 백목련, 당의정…. 세상의 흰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생각하는 것들은 이렇다. 희게 얼어 있는 바다, 태양 빛이 조금 더 창백해지기 시작하는 서리가 내릴 무렵, 죽은 나비의 투명해져가는 날개, 움켜쥘수록 차가워지는 창백한 두 주먹, 검은 코트 소매에 내려앉았다 녹아 사라질 때까지 1, 2초를 살다 가는 눈,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어느 추워진 아침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 우리 몸이 따뜻하다는 증거로 입술에서 처음으로 새어 나오는 흰 입김, 아무리 멀리 날아가도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 흰 새, 날개를 반쯤 접은 새처럼 머뭇머뭇 내려앉을 데를 살피는 혼처럼 떨어지는 손수건. 이렇게 덧없어 보이는 것들을 떠올리는 가운데 낯선 도시의 사람들이 벽 앞에 초를 밝히고 꽃을 바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러한 일들은 정당한 이유 없이 죽은 사람들에 대한 애도일뿐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그러한 죽음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님을 기억하고 달래기 위한 애도다. 그리고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재건하기 위해 그러한 애도를 이어 나간다.

“아기의 배내옷이 수의가 되고 강보가 관이 되었” 듯이 삶과 죽음은 얇은 종이의 하얀 앞 뒷면처럼 가까운 일이다. 나만 살았다고 온전히 산 것이 아니며 그 옆엔 죽음이 항상 따라다닐 수 있음을 떠올리는 유연한 사고, ‘끌어안음’을 통해 산 자와 죽은 자의 연대, 이유 없는 죽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아기에게 다시 한번 말한다.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 후보작에 올랐으며 2017년 영국 가디언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다. 가디언은 “한강의 ‘흰’은 신비한 텍스트다. 부분적으로는 세속적인 기도서 같기도 하다. (중략) 상처와 고통을 언어로 초월하려는 한강의 소망을 성공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책이다”라고 평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