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를 영화로 읊다]〈92〉표류가 남긴 것
1488년 최부(崔溥·1454∼1504)는 제주도에서 출발한 배가 망망대해에 표류하여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천신만고 끝에 중국 동남부 해안에 도달했지만 최부 일행은 왜구로 오인받는 등 다시 위기를 겪고 육로를 통해 겨우 귀국했다. 최부는 그 사연을 ‘표해록(漂海錄)’에 남겼다. 훗날 남구만(南九萬·1629∼1711)은 ‘표해록’을 읽고 다음과 같이 시를 썼다.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구명보트’(1944년)에서도 독일 잠수함의 공격으로 배가 침몰한 뒤 서로 다른 신분의 표류자들이 다툼을 벌인다. 영화는 독일군 표류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빚어지는 의견 충돌과 사건들을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우연하게도 표류의 극한 상황을 풍랑 속 배에 차오른 물을 퍼내고, 식수 부족으로 물 대신 술을 나누어 마시며, 갈증으로 인한 정신착란으로 바닷물을 마시는 사례 등으로 ‘표해록’과 유사하게 표현했다. ‘표해록’에서 수부들이 기상 악화로 뭍으로 향하는 방향을 알 수 없었다면, ‘구명보트’에선 독일군 표류자의 농간으로 아군이 아니라 적군의 배를 향해 간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무인도에 표류했던 척은 사방으로 뻗은 길 가운데서 앞으로 갈 인생의 행로를 찾기라도 하듯 이리저리 몸을 돌려본다. CJ ENM 제공
누구에게나 삶이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것같이 절망감만 가득할 때가 있다. 하지만 어려움을 극복하고 목적하는 곳에 도착하더라도 삶이란 문제는 지속된다. 표류에서 돌아온 영화 속 척의 모습과 최부의 사연에서 표류가 삶에 남긴 흔적과 과제를 함께 생각해 본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