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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미언 허스트와 호두과자가 만났을 때[여행스케치]

입력 | 2024-10-26 01:40:00


천안 뚜쥬르 빵돌가마마을에 있는 대형 돌가마. 천안=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천안지안인자안(天安地安人自安). 하늘이 편안하고 땅이 편안하니 인간 또한 편안하다. 충남 천안이 그만큼 살기 편안하다고 자부하는 표현이다. 한갓진 곳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유관순의 아우내장터와 독립운동가 이동녕 이범석 생가에 독립기념관까지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있다. 다만 마냥 엄숙하지만은 않다. 자주 듣고 보던 곳을 살짝 다른 눈으로 살피면 상흔의 치유와 생명의 역동을 느낄 수 있다.

● 일락서산(日落西山)

높이 519m 흑성산 남동쪽 자락 독립기념관에서는 몸가짐이 바르게 된다. 일제(日帝)가 강요한 굴종과 예속에 대한 저항의 기록 앞에서 당연하다. 전시관을 거치며 숙연해진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보자. 동양 최대 기와집 ‘겨레의 집’에서 남서쪽으로 걸어간다. 야트막한 언덕으로 올라가는 화강암 계단이 보인다. 층층대를 이룬 돌들이 서로 다르다. 평평한 언덕마루에 올라 열 걸음 정도 내딛는다. 아하!

지름 약 40m, 깊이 5m의 3층 계단식 원형 구덩이다. 고대 로마 콜로세움 같다. 중앙에는 첨탑이 서 있다. 높이 8.5m, 직경 3.5m, 무게 35t. 구리판이 덮인 원형 기단(基壇) 위로 돌기둥 12개가 꼬챙이 달린 투구 모양 상단을 받치고 있다. 1995년 8월 15일 철거된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첨탑이다. 구덩이 안팎에는 밑동이나 윗동아리만 남은 돌기둥이 여기저기 서 있거나 누워 있다. 그 건물 잔해다.

연면적 3만1309㎡(약 9471평), 반지하 1층, 지상 5층, 구리판 붙인 중앙 콘크리트 돔으로 이뤄진 거대한 건물이 경복궁 근정전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착공 10년 만인 1926년 완공된 뒤 19년간 일제 지배의 총본산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82년까지 중앙청이라는 이름으로 정부종합청사 노릇을 하다 철거될 때까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였다.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 공원. 중앙에 조선총독부 청사 첨탑이 놓여 있다. 주변 돌들도 당시 계단과 기둥 등을 철거하고 남은 것이다. GNC21 제공

그 건물의 기둥, 발코니, 모서리 탑, 계단 난간을 비롯해 17가지 부재(部材)로 쓰인 총중량 1000t가량 돌들이 약 5000㎡(약 1500평)의 폐허가 된 무덤 같은 땅에 흩어져 있다.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 공원’이라는 이름 아래.

공원은 독립기념관 서쪽에 뒀다. 해가 지는 곳이다. 침략의 덧없음과 석양의 쓸쓸함이다. 땅을 5m 판 것은 총독부 건물의 상징인 첨탑을 내려다보게 하려 함이다. 또 5m는 일제가 광화문을 치우고 경복궁 안 홍례문(흥례문)을 없앤 뒤 기초공사를 하기 위해 판 땅의 깊이다. 일제는 압록강 주변 낙엽송 말뚝 9388개를 박아 터를 다졌다. 하지만 해는 서쪽으로 진다. 이제 첨탑이 우리를 올려다본다.

이 장소는 누군가에게는 해원(解冤)이다. 깊은 상처의 치유다. 그것은 분풀이를 넘어선다. ‘죽음’이라는 주제를 천착해온 영국 현대 미술의 총아(寵兒) 데이미언 허스트는 해골에 다이아몬드 8601개를 박아 넣은 작품 ‘For the Love of God’(2007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죽음과 마주할 때 해골을 장식하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장식을 일종의 죽음에 대한 헌사, 찬사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그리스 신전 같다”고 하는 이 공원은 일제의 죽음에 대한 ‘장식’이다. 35년간 한국인이 받은 억압의 종말에 대한 헌사다. 누군가에게는 잔잔한 감동이다.

● 생명과 치유

이것은 문화예술진흥법 건축물미술작품 제도에 대한 통렬한 야유다. ‘연면적 1만 m² 이상 건물을 지을 때 사업비 최고 0.7%를 미술품 설치 비용으로 써야 한다’는 규정이 구색 맞추기용 작품을 양산하는 현실에 대한 고급스러운 풍자다. 아라리오 조각광장 이야기다.

천안 아라리오 조각광장에 있는 데이미언 허스트 작품 ‘찬가(Hymn)’.

천안시 동남구 만남로에 있는 이 광장에는 허스트의 에나멜 도색 청동상 ‘찬가(Hymn)’를 비롯해 아르망 페르낭데즈, 키스 해링, 수보드 굽타, 나와 고헤이, 씨킴, 성동훈 등의 조각품 28점이 놓여 있다. 거대한 유리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작품 ‘찬가’는 높이 6m, 무게 6t. 그 앞에 서 있는 높이 20m 아르망의 작품 ‘수백만 마일―머나먼 여정’은 못 쓰는 차축 999개를 쌓아 올렸다. 굽타의 작품 ‘통제선’은 쇠로 된 헌 냄비와 그릇, 컵 같은 요리 도구 수천 개를 붙여 커다란 버섯구름을 만들었다. 나와의 작품 ‘매니폴드’는 높이 13m, 가로 16m, 세로 12m에 27t이나 나간다.

작품들이 놓인 공간은 낯설다. 광장과 거리에 조각품들이 서 있지 않고, 이 작품들이 건물과 광장과 거리와 사람을 규정하는 듯하다. 이들이 사라진다면 그저 어느 도시 번화가 풍경일 뿐일 터다. 허스트는 말했다.

“나사(미국항공우주국·NASA)가 찍은 달 사진을 보면 거기에 깃발이 있다. 미지의 땅인데 깃발을 꽂는 순간 사람들은 그 땅을 안다고 믿기 시작한다. 그런데 깃발을 치워버리면 그건 그냥 어떤 미친 풍경일 뿐이다.”

낯섦은 두려움과 함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내포한다. 허스트가 아들의 2만7000원짜리 장난감 ‘어린 과학자의 해부학 세트’ 인체 해부 인형을 확대해 만든 ‘찬가’는 죽음과 치유를 되새기게 한다. 미술에도 의학처럼 치유 능력이 존재한다고 믿는 허스트는 “예술은 당신에게 무언가를 더 줄 수 있는데 그건 선물과도 같다”고 했다. 치유는 희망과 연결된다. 이 광장을 만든 김창일 아라리오그룹 회장도 “미술은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느티나무 그늘처럼 누구에게나 휴식이 됨을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난달 27일 천안 동남구 만남로에서 열린 천안흥타령춤축제 2024 댄스 퍼레이드 장면. 천안시 제공

지난달 27일 ‘도전과 창조 정신이 어우러진 춤’이라는 주제로 55개국 무용수 4000여 명이 참가한 천안흥타령춤축제 2024 댄스 퍼레이드가 만남로에서 열렸다. 차량 통행을 막은 찻길 중앙선에서 바라본 광장의 작품들은 또 다른 풍경을 제시했다. 하루 몇 분이라도 사람들이 이 길에서 조각품들을 바라보면 좋겠다.

● 약동

천안시립흥타령풍물단의 버나놀이.

치유돼 희망을 품은 생명은 살아 움직인다. 목천읍 이동녕 선생 생가에서 약동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다. 30㎡(약 9평) 남짓한 마당에 앉아 장구와 꽹과리 징 북의 풍물을 듣는다. 그릇을 돌리며 태조산 매 잡는 시늉을 하는 버나놀이와 소고 치며 상모를 돌리는 채상소고놀이, 긴 상모를 돌리는 열두 발 상모놀이를 바로 앞에서 보니 심장이 벌렁벌렁한다. 천안시립흥타령풍물단이 매주 목요일 오전 11시 20분에 공연한다. 아쉽게도 31일이 올해 마지막 순서다.

천안 태조산 산림레포츠단지 활강 집코스터.

아쉬운 마음은 태조산 산림레포츠단지에서 달랠 수 있다. 숲속 공중에 설치된 레일에 줄 하나 걸고 활강하는 집코스터다.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집코스터 가운데 레일 길이가 510m로 가장 길다.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나무에 부딪칠 것만 같은 스릴과 2분 만에 주파하는 속도감이 내 몸을 느끼게 한다.

광덕사 호두나무. 천안 호두과자의 중시조 격인 나무다.

천안 호두과자를 ‘잉태한’ 나무를 만나러 갈 시간이다. 광덕리 광덕사 호두나무다. 높이 약 20m, 수령(樹齡) 약 400년의 호두나무가 무성한 가지를 쫙 벌려 맞아준다. 고려 말 역관 유청신이 가져와 심은 호두나무 묘목의 증손 격이란다. 그러니까 호두과자의 중시조(中始祖)다. 이렇게 생명은 이어지고 있다.

※허스트의 말은 ‘내가 만난 데미언 허스트―현대 미술계 악동과의 대면 인터뷰’(마로니에북스)를 참고했다.



천안=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