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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테무-쉬인 습격에… 불꺼진 봉제 메카 창신동

입력 | 2024-10-26 01:40:00

中 저가 의류 쏟아져 들어와
봉제학원-공장 줄줄이 폐업




“48년 동안 창신동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 정도로 어려운 건 처음입니다.”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창신동. 차경남 씨(65)는 텅 빈 봉제공장 내부를 허탈한 듯 바라봤다. 그는 40여 평의 이 공장을 세를 주며 운영해 왔지만, 현재는 직원은커녕 각종 봉제 장비도 사라진 상태였다. 차 씨는 “더는 적자를 감당할 수 없어 올해 2월에 공장을 매물로 내놨는데 아직도 안 나갔다. 청바지 공장도 운영 중인데 그곳도 걱정”이라며 울상을 지었다.

60여 년간 서울 종로구와 중구 일대를 중심으로 이어져 온 국내 봉제업이 고사 위기를 맞고 있다. 1960년대 섬유산업 호황으로 봉제공장이 몰린 창신동(사진) 일대엔 ‘드르륵’ 하는 미싱(재봉틀)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창신동 골목은 매일 아침 옷을 주문하러 온 동대문시장 상인들로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최근 알리익스프레스, 테무 등 중국 전자상거래 업체와 중국 ‘인스턴트 패션’ 기업 쉬인을 통해 값싼 옷들이 국내 시장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봉제업계는 그야말로 직격탄을 맞았다. 일대에서 숙녀복 공장을 운영하는 박만본 씨(55)는 “중국산 저가 의류를 사려는 사람들이 늘어 올해 매출이 전년 대비 30% 가까이 줄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날 오후 창신동 봉제골목 거리 곳곳에는 ‘40평 임대’라고 붙인 안내문과 불 꺼진 봉제업체들만 가득했다. 통상 가을과 겨울 옷을 만드는 10월은 업계 성수기로 알려져 있지만 봉제골목에선 더 이상 활력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제2의 앙드레 김과 우영미 같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배출할 패션 학원들도 최근 줄줄이 문을 닫고 있다. 이날 기자가 방문한 창신동 일대의 패션 학원 5곳은 폐업해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한 건물 관리인은 “패션 학원에서 배우면 취업이 돼야 하는데 안 되니까 올해 2월에 폐업하고 나갔다”고 했다. 정재우 동덕여대 패션디자인학과 교수는 “국내 봉제업이 죽으면 후방인 섬유 산업과 전방의 패션 디자인 산업도 다 같이 무너지게 된다”며 “업계를 되살릴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봉제 50년… 다들 경비-청소일 떠나”
中저가의류, 봉제업 직격탄
‘알테쉬’ 2만~3만원대 의류 공세… 봉제업체들 못견디고 11% 폐업
“이제 일 배우려는 젊은이 없어”… 서울 종사자 3년새 1만명 줄어

이날 창신동 봉제골목에는 30m마다 불 꺼진 공장들이 2, 3곳씩 있었다. 아예 공장 간판이 떨어져 나가 공장이었는지 모를 낙후된 곳도 많았다.

먼지 등으로 희뿌예진 유리창 안 옷들이 쓰레기더미와 함께 쌓인 채 방치된 공간들도 부지기수였다. ‘공장 문의’ ‘점포 임대’ ‘객공팀 구함’ 등의 종이가 붙은 채 철문이 굳게 닫힌 곳들이 거리 곳곳에 가득했다.

● 서울 봉제업 종사자 수 3년 새 1만 명 줄어

동아일보가 통계청 전국사업체조사 마이크로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서울 봉제의복 제조업 분야의 종사자 수는 2020년 7만875명에서 지난해 6만266명으로 1만 명 넘게 급감했다. 같은 기간 사업체 수도 1만5571개에서 1만3769개로 줄어들었다. 3년 새 11.6% 업체가 사라진 셈이다.

지난해 전국 지자체 가운데 사업체와 종사자 수가 모두 감소한 것은 서울이 유일한데 통계청에선 그 주된 원인을 봉제업체 감소로 꼽고 있다. 통계청 관계자는 “서울시 전체 종사자 수에 영향을 줄 정도로 여성용 겉옷 제조업과 셔츠·블라우스 제조업 등의 사업 규모가 줄어들었다”고 설명했다.

창신동뿐만 아니라 중구 신당동과 성동구 왕십리 일대 봉제거리도 사실상 멈춰 선 상태다. 13년째 신당동에서 옷 샘플을 만드는 하모 씨(66)는 23일 기자와 만나 “열여덟 살 때부터 50년 가까이 봉제업을 했는데 이제는 이 일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없다”며 “이곳에 있던 200여 봉제업체 중 상당수가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경비원이나 청소 일을 하러 떠났다”고 말했다.

왕십리에서 15년 넘게 봉제공장을 운영한 주종녀 씨(59)도 “월급 줄 돈이 없어 전 직원 6명 중 3명을 올봄부터 차례로 내보냈다”며 “10년 넘도록 함께 근무한 가족 같은 사람을 내보내 애가 탄다”고 했다. 주 씨는 내년 봄까지만 버티다 폐업하기로 했다.

● ‘알테쉬’ 중국 이커머스 습격에 ‘직격탄’

최근 국내 봉제업체들이 급격한 침체를 겪고 있는 것은 이른바 ‘알테쉬’(알리·테무·쉬인) 등 중국 이커머스를 통해 들어오는 값싼 의류에 시장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코트 등 여성용 겉옷을 2만∼3만 원대에 구매할 수 있지만 봉제업체에서 납품하는 코트는 소매시장에서 최소 10만 원을 주고 사야 한다.

대한상공회의소가 8월 발표한 ‘2024년 유통물류 통계집’에 따르면 2014년 1조6000억 원이던 해외 직구 규모는 지난해 6조7000억 원으로 급증했다. 지난해 해외 직구 가운데 의류·패션 분야가 3조 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중국발 해외 직구 열풍은 오프라인 의존도가 90% 이상에 달하는 국내 봉제업계에 치명타가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패션산업협회가 실시한 ‘2023년 봉제업체 실태 조사’에 따르면 봉제업체의 유통 비중은 재래시장이 38.9%, 소비자 직접 판매가 21.1%, 브랜드 업체 납품 11.7% 등인 반면 인터넷 쇼핑몰은 7.1%에 그친다.

젊은 봉제사들도 장기간 침체와 열악한 처우를 견디지 못해 업계를 떠나고 있다. ‘2023년 봉제업체 실태 조사’에 따르면 봉제사들은 대부분 12시간 넘게 일하지만 월평균 임금은 약 240만 원에 그쳤다. 강희명 한양여대 니트패션디자인학과 교수는 “현재 봉제업에 종사하고 있는 인력은 70대가 가장 많다”며 “국가 자격증을 만드는 등 패션에 관심 있는 젊은 친구들이 유입될 수 있는 제도와 근로환경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손준영 기자 hand@donga.com
정미경 인턴기자 경희대 경제학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