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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이진영]“난 울 엄니 만나러 가요” 하늘로 떠난 일용 엄니

입력 | 2024-10-27 23:18:00


‘전원일기’는 1980년부터 2002년까지 방영된 최장수 드라마다. 요즘도 케이블 채널에선 전원일기를 방영하는데 양촌리 김 회장 댁 최불암(84) 김혜자(83)부터 큰아들 김용건(78) 고두심(73) 내외와 둘째 아들 유인촌(73)까지 톱스타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이들 중 ‘일용 엄니’ 김수미가 25일 먼저 세상을 떠났다. 향년 75세. 전원일기의 추억이 생생한 이들에겐 ‘일용이 모친상’ 같다.

▷김수미가 일용 엄니를 맡았을 때가 일용이 박은수보다 두 살 어린 31세였다. 요즘 잘나가는 김고은(33) 박은빈(32)보다 어린 나이다. 젊은 배우에게 노역을 맡기는 건 모험이었다. 그런데 방송 첫날부터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인물은 이 하나 빠진 감초역 일용 엄니였다. 일찍 홀몸이 돼 일용이 키우며 김 회장네 덕을 보고 살면서도 때론 용심을 품는 인간적인 조연으로 국민 배우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맞는 일용 엄니 명대사가 있다. “인생사는 계산이 안 맞는겨.”

▷전북 군산에서 김영옥으로 태어나 1970년 MBC 공채 3기 탤런트로 데뷔했다. “동기생 김영애 못지않게 외모에 자신 있었는데 이상한 배역만 들어왔다”고 한다. “연기로 승부 보겠다”고 마음먹었고 드라마 ‘아다다’의 앙칼진 첩실, ‘새아씨’의 몸종 화순이 등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으로 연기상을 휩쓸었다. 머리가 희끗해질 무렵엔 ‘센 캐릭터’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영화 ‘마파도’의 욕쟁이 할매, ‘가문’ 시리즈 홍덕자 여사, 드라마 ‘전설의 마녀’의 일자무식 재소자가 그렇다. 배우로서 독보적 영역을 개척한 그는 “돌멩이도 모양이 다 다른데, 배우들도 다 달라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입담 좋은 예능 스타로 최근까지 웃음을 선사했고, 요리 예능에선 남다른 손맛도 뽐냈다. 드라마 촬영 땐 대형 전기밥솥에 직접 만들고 담근 반찬과 김치를 싸들고 가 스태프 수십 명을 밥해 먹이는 후한 인심으로 유명하다. 고인의 어머니가 없는 살림에도 보따리장수들까지 밥 먹여 보내는 분이어서 “어머니가 지은 복으로 내가 잘산다”고 했다. 친자매 같았던 김혜자에겐 이런 말을 했단다. “혜자 언닌 김치 담글 줄도 모르면서, 내가 밥하고 반찬 해다 주면 먹기만 하면서 왜 국민 엄마야.”

▷“내 얼굴 보면 상욕하고 곗돈 챙길 사람 같지만 사실은 책 좋아하고 꽃만 보면 환장한다.” 에세이집을 포함해 8권의 책을 썼고, 3년 전 써둔 유서시 제목은 어머니가 생전 애지중지 키웠던 ‘나팔꽃’이다. “난 울 엄니 만나러 가요. … 꽃피는 봄도 일흔 번 넘게 봤고 함박눈도 일흔 번이나 봤죠. … 누군가 내 잔디 이불 위에 나팔꽃씨 뿌려주신다면 가을엔 살포시 눈을 떠 보랏빛 나팔꽃을 볼게요. 잘 놀다 가요. 굳바이 굳바이.”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