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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兆 퇴직연금 시장 활짝… 은행 vs 증권사 수익률 ‘무한경쟁’

입력 | 2024-10-31 03:00:00

오늘부터 퇴직연금 실물이전 가능… 해지 않고도 타사로 옮길 수 있어
주식-ELS 등은 제한돼 유의를
은행권, 펀드-ETF 등 상품 확대… 증권사, 투자 성향 따라 자산배분
상담-이전 신청 땐 사은품 지급… 일각 “서비스 차별화에 집중해야”



게티이미지코리아



《퇴직연금 가입자가 계좌를 다른 금융회사로 손쉽게 옮길 수 있는 ‘실물이전 제도’가 31일부터 시행된다.

400조 원에 달하는 퇴직연금 시장에서 ‘머니무브’가 본격화될 것으로 점쳐지는 가운데 고객 자금을 지키려는 은행과 신규 고객을 유치하려는 증권·보험 간의 치열한 각축전이 펼쳐지고 있다.》


퇴직연금 상품 안 깨고 갈아타기 가능

31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9월 말 기준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은 400조878억 원 규모로 집계됐다. 이 중 은행권의 적립금이 210조2811억 원으로 전체의 52.56%를 차지하고 있다.

퇴직연금은 2005년 12월 국내에 처음 도입된 이후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자본시장연구원은 올해 말까지 430조 원, 2033년까지 940조 원 규모로 각각 불어날 것으로 예측한 바 있다. 강성호 보험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민연금, 기초연금 등의 재정 부담 증가가 우려되는 상황”이라며 “퇴직연금과 같은 사적 연금의 노후 보장 기능이 아직은 미흡하지만 2050년께는 국민연금을 초과하는 최대 노후 기금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문제는 KB국민, 신한, 하나, IBK기업, 우리, NH농협 등 상위 6개 은행에만 192조7077억 원이 몰려 있는 데다 아직 수익률도 저조하다는 데 있다. 이는 퇴직금 가입자의 대부분이 투자 손실 가능성이 낮은 예적금 등 원금보장 상품에 자금을 방치해두고 있다는 의미다. 금융위 관계자는 “연금이 국민들의 노후를 사실상 보장해주고 있지 못하다”며 “정부가 퇴직연금 실물이전제를 시행해 업권 간의 수익률 경쟁을 유도하려는 것도 이 같은 상황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31일부터 시행하는 퇴직연금 실물이전은 기존에 보유한 연금 상품을 별도의 해지 절차 없이 타사로 그대로 옮길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지금까지 퇴직연금을 다른 회사로 옮기려면 보유 상품을 모두 팔아 현금화했어야 했는데 이 같은 ‘갈아타기’와 관련된 불편함을 없앤 것이다. 정부는 제도 시행을 통해 업권 간의 경쟁을 도모하는 동시에 퇴직연금 가입자의 선택권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있다. 금융권에서도 실물이전 제도가 400조 원에 달하는 퇴직연금 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것이란 기대가 조심스럽게 나온다.

일각에서는 대규모의 자금 이동이 제한적일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이번 제도 시행으로 이전 가능한 상품은 예금, 정부 보증채권, 회사채, 펀드, 상장지수펀드(ETF) 등이다. 하지만 실물이전이 가능한 상품이라도 옮겨 타려는 금융회사가 해당 상품을 취급하고 있어야 이전이 가능하다는 점이 걸림돌이다. 연금 고객이 보유 중인 ETF를 갈아타려는 금융사에서 거래할 수 없다면 예전처럼 미리 매도해 현금화해야 계좌를 갈아탈 수 있다는 얘기다. 또 주식, 주가연계증권(ELS),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영제도) 등은 실물이전이 불가능한 것도 한계점으로 거론된다.

은행권 퇴직연금 담당 임원은 “생각보다 실물이전이 까다롭기 때문에 가급적 모든 퇴직연금 사업자가 참여해야 소비자들이 실질적으로 갈아탈 수 있다”며 “31일부터 시행되더라도 일부 회사가 불참하는 상황이라 서비스가 제대로 작동한다고 단정 짓긴 이르다”고 우려했다.



400兆 자금 유치전 가열

은행권과 증권업계는 각 사의 빼어난 실적을 홍보하는 등 활발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보험사의 경우 실물이전 대상이 아닌 ‘보험형 자산관리계약’이 적립금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자금 유치 경쟁이 사실상 은행과 증권업 간의 ‘양 강 경쟁’으로 펼쳐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보험사 상품 중에서 실물이전이 불가능한 유형이 생각보다 많은 게 사실”이라며 “결국 수익률을 앞세운 ‘증권사들의 공격’과 ‘은행권의 방어’가 펼쳐지는 모양새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은행권은 퇴직연금 상품을 다양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증권업계 대비 거래 가능한 상품 종류가 부족한 편이기 때문이다. 신한은행은 펀드 상품 수를 348개에서 413개로, ETF도 131개에서 177개로 각각 늘릴 계획이다. KB국민은행은 ETF 상품을 68개에서 101개로 확대하는 동시에 퇴직연금 고객을 대상으로 한 ‘1대1 자산관리 상담 서비스’도 개시했다.

증권사들은 신규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공격적인 투자 성향을 지닌 고객을 확보해 시장점유율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증권사 중 적립금이 가장 많은 미래에셋증권은 인공지능(AI)으로 자산 배분을 도와주는 ‘로보어드바이저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한국투자증권은 퇴직연금 계좌에 적립식 자동 투자 개념을 도입해 차별화를 꾀하는 중이다.

은행과 증권사들은 실물이전 상담을 신청하거나 계좌를 옮기기로 한 고객에게 상품권 등을 제공하는 다양한 이벤트도 병행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금융사들이 이 같은 판촉 전략을 펼치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형 증권사 퇴직연금 담당 임원은 “금융상품과 서비스의 차별화를 통해 자금을 유치해도 모자랄 판에 커피 쿠폰, 사은품 등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경품들을 내세워 퇴직연금 신규 고객을 모집하고 있다”며 “내로라하는 금융사 대부분이 이 같은 마케팅으로 ‘과당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한국 퇴직연금 사업이 후진적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꼬집었다.

강우석 기자 ws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