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숙공 이예 초상화. 사진 출처 전통문화포털
이문영 역사작가
이예가 쓰시마에 갔던 것은 1443년 6월에 제주를 침입한 왜구 때문이었다. 이들은 제주를 약탈하여 우리 백성들을 납치해 갔는데, 관군의 반격으로 달아났다. 이때 마침 태풍이 불어 배 한 척이 부서졌다. 덕분에 왜구들을 포로로 잡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돌려보내고 피랍된 백성을 찾아오기로 했다. 칠십이 넘은 이예는 자진해서 쓰시마에 가서 납치된 사람들을 모두 찾아오겠다고 나섰다.
이예는 본래 울산의 향리였다. 24세 때 왜구가 노략질하러 와서 울산군수를 잡아가자 자진해서 그를 따라갔다. 왜구는 본래 군수와 이예를 모두 죽일 생각이었으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예가 상관을 극진히 모시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돌렸다. 조정에서는 군수를 모시고 무사히 귀국한 이예의 충절을 높이 사서 그를 양반으로 신분을 올려주었고 그는 중인에서 종2품까지 승진한 입지전적 인물이 되었다.
이예가 쓰시마에 갔을 때 서성은 그가 빠져나올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알고 매달렸다. 하지만 이예는 자국민이 아닌 그를 구해갈 명분이 없었다.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었기에 도주(島主)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언질을 주었다. 서성은 쓰시마 도주에게 청하여 송환을 허락하는 서류를 받아냈다.
이예가 명나라 사람까지 구출해서 돌아오자 조선 조정에 비상이 걸렸다. 명나라 허락 없이 외국에 사신을 보내 소통하는 것을 그가 다 알릴 것이니 내보내지 말고 산골에 유배해서 가둬놓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격론 끝에 서성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현명한 결정으로 인해 양국의 우호 관계가 더 단단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예는 어머니의 원수인 일본을 국가 대계 안에서 대할 줄 알았다. 그는 쓰시마와 조선 사이에 체결되어 평화를 유지하게 한 계해약조를 맺은 주역이기도 했다. 계해약조를 통해 조선은 화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유황을 얻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전함과 화포의 개량에 대해 진언하는 등 국방 문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국방에 대비가 없다면 왜구는 언제든 날뛸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예는 세종에게 일본을 대하는 외교 정책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의를 설파하고 생계를 도모해서 마음속으로부터 복종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명이라는 초강대국과 사납기로는 짝이 없는 일본 사이에 있는 조선에서 이예는 평화를 모색하는 길을 찾는 외교관이었다. 북방의 정세가 날로 험악해지는 오늘날 대의와 실리를 다 같이 도모한 이예와 같은 외교관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문영 역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