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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걸리던 점자책 번역, 30분이면 뚝딱… AI로 정확도 100%로 높여

입력 | 2024-10-31 03:00:00

[행복 나눔]점자기술 전문 사회적기업 ‘센시’
AI에 사례 학습시켜 프로그램 개발
글자-이미지 분류해 분야별로 번역… 영어-스페인어 등 48개 언어로 가능
저시력자 위해 점자병기 출판물 제작… 글자 크기-사진-색상 등 그대로 살려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콘텐츠 제작”



17일 서울 강남구의 사무실에서 ‘센시’의 서인식 대표가 점자책을 들어 보여주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시각장애인 중 선천적으로 시각장애를 갖고 태어난 비율은 1%가 채 안 됩니다. 누구나 불의의 사고로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17일 서울 강남구의 사무실에서 만난 점자기술 전문기업 ‘센시(SENSEE)’의 서인식 대표는 “시각장애인에 대한 보다 많은 배려가 필요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센시는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점자를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번역하고,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비장애인까지 모두가 함께 읽을 수 있는 점자 콘텐츠를 제공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서 대표는 2015년 센시를 설립해 현재 10년째 운영 중이다. 2016년 SK그룹의 사회성과인센티브에 참여한 데 이어 2020년 SK텔레콤의 임팩트업스에 선발되는 등 지속적인 혁신을 보이며 성장하고 있다.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리는 세상’을 기업 설립 목표로 정한 서 대표는 시각을 감각화한다는 의미를 담아 사명에 ‘감각(sense)’과 ‘보다(see)’라는 단어를 담았다.

● AI 프로그램 개발해 번역 속도 높여

“처음에는 그냥 아버지께 점자 번역기를 사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점자 번역기를 찾아보니 가격이 비싼 데다 고령자가 사용하기에는 너무 어려워 보였죠.”

서 대표는 젊은 시절 저시력자였던 아버지가 연세가 들면서 점차 시력을 잃어가는 상황을 가까이에서 안타깝게 지켜보며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정보기술(IT) 관련 사업을 하던 서 대표는 점자 번역기를 알아보다 ‘직접 만들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후 2013년부터 2년간 복지관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으며 기존 점자 기기의 형태와 장단점, 제작 배경 등을 조사했다.

기존 점자 번역기는 300쪽 분량의 책 한 권을 번역하는 데 길게는 6개월이나 걸렸다. 특히 복잡한 수식이나 화학식 등 이공계 관련 내용은 번역가들조차 이를 쉽게 이해하지 못해 번역 사례가 거의 없었다.

서 대표는 이에 AI를 활용하기로 했다. AI에 점자 오번역 사례 등을 학습시키고 번역할 내용을 텍스트, 이미지, 이공계 숫자 등으로 분류한 뒤 분야별로 번역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그 결과 점자책 번역 소요 시간은 권당 평균 30분대로 줄였고 정확도도 100% 가깝게 올랐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보통 인쇄소에서 센시의 점자 번역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게 쉽지 않았던 것이다. 점자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인쇄소에서는 위아래를 반대로 찍는 사례도 생겼다. 이에 서 대표는 2021년 출판 공장을 직접 마련해 점자 인쇄에도 뛰어들었다. 또 효율성을 높여 한 권에 5만 원가량이었던 점자책 생산단가를 2000원 안팎까지 떨어뜨렸다.

● 달력-앨범에도 점자… 해외 반응 뜨거워

점자기술 전문기업 ‘센시’의 점자책은 기존 점자책과 달리 모든 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다양한 색상의 그림을 넣고 점자를 일반 글자 옆에 병기하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점자와 관련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모두 갖춘 센시는 현재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읽을 수 있는 ‘점자 콘텐츠’를 제작 중이다. 시각장애인은 눈으로 책을 읽을 수 없다고 보고 점자 책에는 아무런 그림이 없이 점자만 나열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서 대표는 “시각장애인 중 일부는 시력이 살아있는 저시력자”라며 “기존에 출시되던 시각장애인 서적은 점자책이거나 저시력자용으로 활자를 크게 만들어 발행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센시는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색상이 살아있는 원본 책에 점자를 찍고 있다”고 말했다. 또 서적뿐 아니라 달력, 아동용 색칠놀이 교재, K팝 앨범, 택배 송장 라벨 등 다양한 출판물에 점자를 병기하고 있다.

센시의 점자 병기 기술과 콘텐츠는 해외에서도 호응을 얻고 있다. 최근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등 해외 유수 대학과 논문 점자 번역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각국 정부와 교과서 점자 번역도 추진하고 있다.

센시의 점자 번역 프로그램은 영어, 스페인어 등 전 세계 48개 언어로 번역할 수 있어 매출액의 절반 이상은 미국과 중남미, 유럽 등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서 대표는 “해외 주요국은 점자 병기를 갈수록 강력하게 법제화하고 있다”며 “국내에서는 제품 이름만 점자로 표기한다면 스페인 등에서는 유통기한과 사용법, 주의사항 등 제품의 주요 정보까지 모두 점자로 표기하게 하는 식”이라고 말했다.

마침 다음 달 4일은 ‘점자의 날’이다. 1926년 11월 4일 송암 박두성 선생이 6점식 한글 점자인 ‘훈맹정음’을 발표한 것을 기리며 3년 전 법정 기념일로 지정됐다. 서 대표는 “국민들이 점자를 기념일에만 생각하는 ‘그들만의 언어’가 아니라 영어를 배우듯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또 하나의 외국어로 받아들이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예윤 기자 yea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