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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가 만난 사람]“美서 삼국사기 읽으며 자라… 호랑이 같은 독립투쟁 그렸다”

입력 | 2024-10-31 23:09:00

톨스토이문학상 수상… 재미 소설가 김주혜
‘독립운동가 후손’ 한국 정체성 각별… “이민 후에도 정지용-김현 읽으며 자라”
韓역사 다룬 첫 소설, 14개국 판권 팔려
발레리나 이야기 차기작 이달 美 출간




그의 책 ‘작은 땅의 야수들’ 속 호랑이는 “작은 영토에 걸맞게 고만고만하게 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유와 독립을 지켜낸 한국인”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는 “교향곡처럼 웅장한 서사를 쓰기 위해서 망설임 없이 (이들의 이야기를) 택했다”고 했다. 김주혜 작가 제공

《“하늘은 하얗고 땅은 검었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그의 데뷔작은 여러 면에서 한국 독자들을 놀라게 했다. 깊은 설산 여명의 순간을 수묵화처럼 그린 첫 문장을 600페이지 넘는 묵직한 서사로 밀고 나가면서 한반도의 근대사를 되살린 이가 30대 중반의 젊은 재미 작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홉 살 때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로 이주했다. ‘작은 땅의 야수들(원제 Beast of Little Land)’은 2021년 미국 출간 후 신인의 데뷔작으론 이례적으로 뉴욕타임스 등 40여 개 매체 추천도서에 올랐고, 미국 데이턴문학평화상 최종후보에 오르며 화제가 됐다. 올해 러시아 최고 권위 문학상인 톨스토이문학상을 받으며 가장 주목받는 차세대 한인 작가 중 한 명이 됐다. 소설가 김주혜(37)의 이야기다.》


미국에서 줄곧 성장해 아이비리그 명문 프린스턴대를 졸업했고 뉴욕의 출판사에서 일하다 영어로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됐지만, 그는 영어 이름을 따로 쓰지 않는다. 이민 이후로도 한국인으로의 정체성과 언어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우주의 지혜(宙慧)를 뜻하는 주혜란 한국 이름을 각별하게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가을 결혼한 후 관광객들로 북적대는 영국 런던 노팅힐 인근에 자리 잡았다는 그와의 화상 인터뷰도 모두 한국어로 이루어졌다.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언제부터 작가가 되고 싶어했나.

“어릴 적부터 발레, 첼로 등을 하면서 책뿐 아니라 예술 전반에 관심이 많았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영향을 받아 미술사학을 전공했고 박물관, 패션회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10여 년 전 출판사에 근무하면서부터 하게 됐다. 나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한국계 미국 작가가 택한 첫 소설의 주제가 왜 한국의 근현대사였나.

“독학으로 습작할 때 길잡이가 돼준 게 레프 톨스토이, 가장 영감을 준 작품이 ‘안나 카레니나’였다. 그처럼 예리한 통찰력, 깊은 연민, 인간 보편성을 보여 주는 작품을 쓰려면 역사를 관통하는 장대한 스케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삼국사기’ 같은 한국사 책을 읽으며 자랐기에 첫 장편을 써야 했을 때 망설임 없이 택했다.”

‘작은 땅의 야수들’은 한반도에 번성했던 호랑이의 이미지를 통해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한국인의 강골함과 독립운동사를 녹여낸 대하소설이다. 소작농의 딸로 기생이 된 ‘옥희’와 가난한 사냥꾼의 아들로 경성을 떠도는 주먹이 된 ‘정호’의 삶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지주와 소작농 등 수많은 이들의 삶을 교차시킨다.

그가 이 작품으로 수상한 톨스토이문학상은 톨스토이 탄생 175주년인 2003년 레프 톨스토이 박물관이 삼성전자 러시아법인과 함께 제정한 러시아 최고 권위의 문학상으로 줄리언 반스, 오르한 파무크 등이 수상했다. 올해 최종 후보 10편에 오른 작품 중에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올가 토카르추크도 포함돼 있었다.

―이민 가정에서 지킨 한국적 정체성이 작품에 큰 자양이 된 것 같다.

“김구 선생 곁에서 독립운동을 한 외할아버지 김태희 씨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한국인, 한국문화에 특별한 자부심이 있다. 국문학 석사인 어머니 책장에서 김현 평론집, 정지용 시집 등 문학이론과 한국어만의 질감과 풍경미를 드러낸 문학을 읽으며 컸다.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를 아주 어릴 때부터 눈물 흘리며 접했고 이 책을 쓰면서도 그런 감동을 투영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데뷔작으로 단숨에 주목을 받은 것 같지만, 사실 작가로 첫 시작은 만만치 않았다. 그는 “본격적으로 작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한 2014년만 해도 신인 작가들은 대부분 백인 작가였다. 두드러지는 활약을 하는 한인 작가도 없었고, 관심을 크게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여러 단편을 에이전트에 보냈지만 출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함박눈 오는 공원을 달리던 날 문득 호랑이와 마주친 사냥꾼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러 인물이 별자리처럼 그려졌다. 그는 한국어판 서문에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내 경험으로는 맞다. 내가 책을 쓸 때 가장 나다운 글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었다”고 썼다 .

―일과 집필을 힘들게 병행했었다고 들었다.

“뉴욕에서 일하는 동안 평일 새벽 5시부터 7시, 퇴근 후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썼다. 주말에는 하루 종일 썼다. 10분 단위로 시간을 쪼갰다. 전투적이었다. 남들의 10배는 노력하는데 성과는 10분의 1도 나지 않는 것 같아서, 자책하고 의구심에 시달리던 시간도 있었다.”

초고 집필에 5년, 출판사와의 교정에 1년, 총 6년이 걸려서 영문판이 나왔고 다시 한 해에 걸친 예닐곱 번의 수정을 거쳐서 한국 번역본이 출간됐다. 2019년 최인호 작가의 단편 ‘이 지상에서 가장 큰 집’을 번역했던 적이 있던 그는 문학번역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안다. 한국어판이 매끄럽게 읽힐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애썼다.

―쓰면서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점이 있었다면….

“등장 인물을 줄여야 했다. 더 세세하게 쓰고 싶었지만 현대 미국 출판시장에서 그렇게 긴 작품은 불가능했다. 영문판 기준 100페이지를 줄였다. 윌리엄 포그너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킬 유어 달링(Kill your darlings).’ 애지중지하는 등장인물을 죽이란 말이다. 창작에 도취되지 말고 전체 흐름을 살려라. 미국 편집자와 에이전트에서 계속 들었던 부탁과 경고도 ‘너무 길게 쓰지 마라’였다.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

지난달 10일(현지 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의 볼쇼이극장에서 톨스토이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김주혜(오른쪽)와 러시아판 번역가인 키릴 바티긴. 김주혜 작가 제공


―큰 상을 받고 난 뒤에 달라진 게 있나.

“파노라마처럼 사회 각층을 자유자재로 보여 주면서도 인간 내면의 진실, 통찰력과 깊은 사랑을 보여 주는 글쓰기를 톨스토이에게 배웠다. 인간, 작가, 아내로서 해야 하는 일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그의 문체와 인도주의적 문학 정신을 계승했다는 극찬을 받았으니 이전과는 절대 같을 수 없는 전환이 됐다.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라고 느꼈다.”

그는 이달 러시아, 프랑스를 배경으로 프리마 발레리나의 사랑을 다룬 두 번째 장편 ‘밤새들의 도시’를 미국에서 출간한다. 수상 이후 각국에서 출간과 인터뷰 일정이 새벽까지 쏟아지지만 어떤 곳보다 우선순위를 두는 곳이 한국이다. “내 작품의 문학적·역사적 가치를 가장 잘 평가할 수 있는 분들이 한국 독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에 이어 겹경사다. 한국 작가들이 부상하는 요인이 뭘까.

“한강 작가와 함께 논의되는 것 자체가 영광이다.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굉장히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개인적 재능뿐 아니라 한국문학번역원이 굉장히 오랜 기간 노력했고 국가적 양성이 큰 역할을 했다.”

―외부에 있었기에 한국 문화의 위상 변화가 더 잘 보였을 것 같다.

“2019년 집필에 에너지가 너무 소진돼 프랑스에 석 달 정도 머물렀는데 그때 이미 많이 바뀌었단 걸 느꼈다. 프랑스에 문화적 동경이 있었다. 그런데 패션잡지를 보니 정작 그들이 동경하는 건 한국이었다. 책이 출간되고 여러 나라 독자들에게 편지 등을 받는데 한국 문화에 대한 소양이 정말 깊다.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도 많다. 너무 뿌듯한 일이다.”

그는 높아진 한국 문화 인기의 덕을 14개국으로의 해외 판권 수출 등에서 같이 누리고 있다고 했다. “브라질의 경우 특별한 홍보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큰 성원을 받았다. 모스크바에서의 북토크 당시 순식간에 책이 팔리고 긴 사인줄이 생기는 걸 보고 한국 문화의 위상 변화를 실감했다”고 한다.

그는 톨스토이문학상 상금 120만 루블(약 1680만 원) 전액을 멸종위기에 놓인 한국 호랑이를 보호하는 한국범보전기금에 기부했다. 책 인세 일부도 관련 단체에 기부해 왔다. 작품 활동만큼 생태보호와 자선활동에 열정적인 것은 “집필하는 것만이 예술이 아니라 가장 필요한 것을 나누는 것이 예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지난해 결혼한 캐나다 출신 남편도 뉴욕에서부터 오래 알고 지낸 사회적기업 그린체크의 창업자로 기후나 환경문제 등에 대한 관심사가 비슷하다. 차기작 역시 소말리아의 한 구제사업 단체에 인세 일부를 보낸다.

―미국에서 차기작이 곧 공개된다. 이번에도 대하소설인가.

“문학적 범주의 다양성을 보여 주고 싶어서 완전히 반대로 했다. 1인칭 한 사람의 목소리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게 했다. 전작이 교향곡이었다면, 이번에는 협주곡이다. 솔로이스트 역량을 보여 주고 싶어서 뜨거움과 도회적 매끄러움을 오가게 하려고 노력했다.”

―집필 루틴, 혹은 글을 쓸 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런던으로 이사오며 서재도 책상도 없어졌다. 시상식 당시 주최측 안내로 톨스토이 생가를 둘러봤는데 곳곳이 책상이더라. 집필 환경이 너무 다르다고 푸념했더니 그분들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책상은커녕 욕조에서 ‘롤리타’를 썼다”고 했다. 그래, 그냥 써야지. (웃음) 매일 아침 글 쓸 커피숍을 찾는 게 일과가 됐지만, 한번 몰입하면 사실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시간대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다만 글을 쓸 때의 어떤 정신 상태는 중요한 것 같다. 커피가 큰 도움이 된다.”







김주혜 약력△1987년 인천 출생
△1996년 가족과 미국 포틀랜드로 이민
△2009년 프린스턴대 미술사학 졸업
△2016년 영국 문학잡지 ‘그란타’에 단편소설 ‘보디랭귀지’ 발표
△2021년 장편 데뷔작 ‘작은 땅의 야수들’ 출간
△2022년 데이턴문학평화상 최종 후보
△2024년 러시아 톨스토이문학상 수상


박선희 문화부 차장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