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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를 ‘해야 할 일’ 아닌 ‘하고픈 일’로 채우는 법[정경아의 퇴직생활백서]

입력 | 2024-11-03 23:03:00


직장인에게 있어 퇴직은 어떻게 다가올까. 크게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열심히 일한 뒤에 주어지는 달콤한 휴식이거나 만나고 싶지 않은 공포이거나. 무엇이 이 둘을 결정짓는 걸까.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내가 만났던 퇴직자의 상당수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퇴직을 아쉬워했다. 대부분 경제적인 측면에서 고민이 컸다. 당장 고정적인 수입이 없을뿐더러 향후 국민연금을 받게 되더라도 충분치 않을 거라고 불안해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돈 걱정을 하였다. 내 처지도 다르지 않았다. 팍팍한 일상이 퇴직자의 당연한 숙명이라고 생각하려던 찰라, 퇴직 이후의 인생도 노력 여하에 따라 행복해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준 두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소규모 하청 업체에 몸담았던 김 부장이라는 친구이다. 김 부장에게 수십 년간 일해온 회사는 분신과도 같았다. 최선을 다해 직장생활을 하였지만, 언제부턴가 그의 마음속에 헛헛함이 찾아왔다. 한동안 고민하던 김 부장은 스스로 회사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현실적인 문제들로 인한 망설임 앞에서 가족들의 응원은 큰 용기를 주었다.

김 부장은 어릴 적부터 나라 밖 세상에 호기심이 많았다. 세계여행은 시골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동경 그 자체였다. 어른이 되면 여행을 실컷 하겠노라고 다짐했지만, 막상 취업해 보니 급여를 받아도 온 식구가 생계를 유지하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자 그는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했다. 타고 다니던 자동차를 처분하고 최대한 지출을 줄여가면서 먼 훗날을 대비하였다. 눈앞의 편안함과도 맞바꿀 만큼 그의 소망은 간절했다.

현재 김 부장은 외국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있다. 가보고 싶었던 국가에서 30일을 머물다 귀국해 다시 떠나는 삶이다. 그가 다녀온 국가만 해도 조지아, 태국을 포함해 10여 개국에 이른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 탓인지 나름의 경비 절약 노하우도 상당했다. 항공료는 피크 타임을 피해 저가 항공사를 활용하고, 숙식비는 알려지지 않은 곳들을 이용하는 방법이 장기 해외여행을 저렴하게 하는 그만의 요령이었다. 때가 되면 본인의 여행담을 모아 책을 내겠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김 부장은 마냥 행복해했다.

또 한 사람은 작은 무역회사에서 퇴직한 박 이사라는 지인이다. 대표와 사이가 막역하여 몇 년은 더 근무할 줄 알았는데 경기가 어려워지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그만둔 경우다. 회사와 이별하며 안타까운 심정은 들었지만, 오히려 박 이사는 인생을 바꿀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다. 긴 시간 품어 왔던 자신만의 열망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유년 시절 박 이사의 장래 희망은 기타리스트였다. 박 이사는 코드를 봐가며 기타 줄을 튕겼던 옛 추억을 빠짐없이 간직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반대로 단념하고 말았지만, 그는 악기를 손에서 놓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사회인 밴드에 가입하여 멤버들과 공연했던 사진을 보니 지난 바람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느껴졌다. 무대에 오르는 순간이 가장 신난다는 그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쳤다.

근래 들어 박 이사는 연주회를 앞두고 연습실에서 매일 밤을 지새우고 있다. 다른 공연들도 많이 봐야 한다며 틈틈이 길거리 버스킹도 찾아다녔다. 이를 증명하듯 박 이사의 개인 SNS에는 관람 리뷰가 빼곡했다. 낮에는 새로 구한 직장에서 일하고 있어 피곤할 법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국민연금 받을 때까지 부지런히 뛸 거라는 그의 표정은 되레 들떠 보이기까지 했다.

김 부장과 박 이사, 이 두 사람에게는 남들이 갖지 못한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이루고 싶은 오랜 꿈이었다. 고된 세월 잠시 접어 두었지만, 두 번째 출발을 하려는 지금 하나씩 꺼내어 완성해 가는 중이었다. 그 이유에서인지 두 사람은 세상을 보는 시각과 생활하는 스타일이 사뭇 달랐다. 좋아하는 것만 하기에도 짧은 날, 타인의 눈치까지 볼 겨를은 없어 보였다.

두 사람 다 부유하지는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돈의 많고 적음보다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의지였다. 모자라는 비용은 불필요한 씀씀이를 줄이거나 재취업을 하는 방식으로 보충해 나갔다. 그렇게 각자의 해법을 통해 과거의 꿈을 오늘로 이끌어 냈고, 오늘의 꿈은 또다시 내일의 현실로 만들었다.

솔직히 퇴직자 입장에서 꿈이라는 말처럼 허황되게 들리는 단어가 없다. 살아내기만도 벅찬데 좋아하는 일을 하라니, 거부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꼭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다. 거리 사진을 찍어 본다든가, 관심 있는 모임에 참여하는 등과 같이 작게 시작해도 좋다. 퇴직 후의 일상이 ‘해야 할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로 채워진다면 삶의 무게도 한결 가벼워지지 않을까.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