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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떠난 소중한 이, 만나면 무슨 말 하고 싶나요[손효림의 베스트셀러 레시피]

입력 | 2024-11-07 11:00:00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




[손효림의 베스트셀러 레시피]

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창작자들은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베스트셀러가 되길 꿈꾸지만,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 희귀한 확률을 뚫고 베스트셀러가 된 콘텐츠가 탄생한 과정을 들여다본다. 창작자의 노하우를 비롯해 이 시대 사람들의 욕망, 사회 트렌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기차 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어느 날 이들은 사고가 난 곳에서 가장 가까운 역에 가면 사고 난 그 날의 열차에 오를 수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 약혼자, 아버지, 짝사랑하는 여학생, 남편을 잃은 이들은 해당 역으로 향하는데….

소설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모모·무라세 다케시 지음·김지연 옮김)이다. 2022년 5월 국내 출간된 이 책은 올해 10월 말까지, 2년 5개월 동안 40만 권이 판매됐다.(국내 출판계의 베스트셀러 기준은 책 판매량 1만 권이다.) 지금도 한 달에 5000~1만 권씩 나가고 있다. 이 책을 발굴한 이기웅 오팬하우스 출판사업본부 이사(49)를 서울 강남구 오팬하우스 사무실에서 지난달 24일 만났다. 모모는 오팬하우스의 출판브랜드다.   

이 이사는 “2020년 일본에서 출간된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 아마존에서 리뷰를 확인하고 소셜미디어를 보니 현지에서 반응이 뜨거웠다”고 말했다. 그는 곧바로 책을 봤다. 어린 시절 3년간 일본에 살았던 그는 일본어를 혼자 공부했고 번역자로도 일했다. 책은 4개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는데, 그는 첫 번째 에피소드를 읽은 뒤 곧바로 계약을 추진했다. 첫 에피소드는 결혼을 앞두고 약혼자를 잃은 여성 히구치의 사연을 담았다. 그는 “단숨에 읽을 정도로 몰입도가 높았고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내용이라 ‘잘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저자 무라세 다케시는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작가로,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은 한국에 소개된 그의 첫 책이다. 이 이사는 김지연 번역가에게 검토를 부탁했다. 김 번역가도 “내용이 좋다”고 했다. 계약을 추진하는 국내 다른 출판사가 없어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판권을 구입했다.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 책표지. 모모 제공


“계약을 진행하면서 책을 다 읽었어요. ‘진짜 잘 되겠다’는 확신이 더 강하게 들었습니다. 한국 독자에게 사랑받는 소설은 몇 가지 요소를 갖추고 있어요. 첫째, 반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 반전이 눈물을 흘리게 만들면 더 효과적이고요. 둘째, 인간의 상냥함을 설득력 있게 그려야 합니다. 이 책은 가족에 대한 내용도 담고 있어서 독자 폭이 넓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순문학과 장르문학 가운데 있는 이른바 ‘중간 소설’ 중에서 이 정도 매력 있는 책은 드물다고 판단했죠.”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다른 에피소드에도 등장하며 서로 연결된다. 저마다 사연을 가진 인물들은 세상을 떠난 소중한 이를 기차에서 다시 만나, 하고 싶었던 말을 건넨다. 마지막에 나오는 반전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이 이사가 책의 성공을 강하게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제가 네 살부터 일곱 살까지 3년 동안 일본에서 살았기에 일본어는 친숙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해 혼자 일본어를 공부했고요. 사회학을 전공했는데 대학 때 교지를 만들었고, 졸업 후 출판사 편집자로 일했어요. 번역자로 7년간 일하며 40권 가까이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습니다. (2006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용의자 X의 헌신’이 국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일본 장르 문학책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죠. 여러 출판사에서 일했는데 그 때부터 일본 장르 문학을 주로 담당했습니다. 에이전시 자료는 보지 않고 제가 직접 책을 찾아봅니다.”

그는 일본 장르 문학 중 어떤 책이 히트를 치고 어떤 책은 사라지는지 그 역사를 지켜봤다.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을 국내에 출간한 이기웅 오팬하우스 출판사업본부 이사.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이 이사는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을 출간하기로 결심한 후 곧바로 마케팅 담당자와 논의했다. “저희 회사는 내고 싶은 책이 있으면 마케팅 담당자와 먼저 상의합니다. 마케터가 거절하면 출간하기 어려운데요, 이 책은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상당수 출판사에서는 마케팅팀을 포함해 내부에서 성공할 확률이 낮다고 판단한 책이라도 편집자가 계속 설득하고 요청하면 결국 출간하는 경우가 꽤 있다. 하지만 오팬하우스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오팬하우스는 콘텐츠 기업 바이포엠스튜디오가 일본 엔터테인먼트 기업 카도카와와 합작해 올해 5월 세운 법인이다. 서현동 오팬하우스 대표는 CJ ENM 출신이다. 바이포엠스튜디오는 출판, 웹툰, 음원을 비롯해 음료, 치킨 프랜차이즈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업하고있다. 바이포엠스퓨디오 대표는 에세이 ‘너에게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를 낸 유귀선 작가(31)다. 카도카와그룹은 출판 게임 영상 웹서비스 교육 등의 분야에서 사업하고 있다. 유명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스즈메의 문단속’,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지식재산권(IP)을 보유하고 있다.

이 이사는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의 경우 우리말 제목을 정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원제 ‘니시유이가하마역의 신(神)’은 어떤 내용인지 알수 없어 한국 독자에게는 전혀 와 닿지 않았어요.(니시유이가하마역은 사고가 난 곳에서 가장 가까운 역 이름이다) 회의를 계속 하며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기차역’이라는 단어는 꼭 들어가야 하고 죽음에 관한 이야기여서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이 세상과의 이별을 그렸다는 것도 고려했고요.”

진통 끝에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이라는 제목이 탄생했다. 마케팅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이 회사는 마케팅이 강한 곳으로 꼽힌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은?’,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소중한 사람에게 무슨 말을 전하겠습니까?’ 등 카피를 만들어 소셜미디어를 통해 책을 알렸다. 출간하자마자 빠른 속도로 책이 나갔고 2022년에만 20만 권이 판매됐다. 오프라인 서점의 매대를 구입해 책을 알리는 전통적인 방식의 홍보도 같이 했다.  

그 다음해인 2023년 4월 표지를 바꿨다. 짙은 푸른색의 일본책 표지를 그대로 썼는데 서점에서 눈에 잘 띄지 않았기 때문. 이에 따뜻한 느낌을 주는 그림으로 유명한 반지수 작가에게 새 표지를 요청했다. 반 작가는 ‘불편한 편의점’, ‘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등의 표지를 그렸다.    

“타켓 독자는 10, 20대 여성이었습니다. 소셜미디어를 많이 쓰는 분들이죠. 회사 마케팅 직원들이 20대에서 30대 초반으로 구성돼 있는데요, ‘SNS에 올렸을 때 책 표지가 예뻐야 한다’고 요청해 표지를 바꿨어요. 벚꽃잎이 흩날리는 가운데 기차가 역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그린 새 표지에 대한 반응이 좋았습니다. 동남아시아 출판사에서도 반 작가가 그린 책 표지를 구매했고요.”

그는 초반에는 마케팅을 통해 적극적으로 책을 알렸지만 40만 권이나 판매된 건 책이 가진 힘 덕분이라고 했다. “10, 20대 여성을 주요 독자층으로 봤지만, 내용 상 여러 세대는 물론 남성 독자층으로도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실제 부모님에게 책을 추천했다거나 선물용으로 샀다는 리뷰가 많습니다. 일본 소설은 (군부대에 비치하는) 진중문고로 선정되기 쉽지 않은데,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은 진중문고로 선정된 것도 의미가 있고요.”

일부 에피소드 중에서는 예측 가능한 내용도 있다.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공사장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부끄럽게 여겨 자신은 대기업에서 근무하려고 악착같이 노력한 아들이 나오는 두 번째 에피소드가 그렇다. 아들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이를 후회한다. 

“기성 세대에게는 익숙하게 여겨지는 내용도 젊은층은 새롭게 느낄 수 있어요. 두 번째 에피소드의 뻔한 내용이 좋았다는 독자도 많더라고요. 뻔함 속에서도 신선함을 찾을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그는 자사에서 출간하는 책의 경쟁 상대로 전혀 다른 분야의 제품을 꼽았다. “저희 책과 경쟁하는 건 액세서리, 화장품, 음료 등입니다. 10, 20대 여성들은 지갑을 열 때 책과 이들 제품을 두루 살피며 기회 비용을 따집니다. 이런 상품들 중 책을 선택하게 만들어야 하죠. 지금까지 저희가 출간한 책 가운데 1만 권 이상 판매된 책이 절반이 넘습니다. 재쇄를 찍은 책은 80%고요. 성공 확률을 높이는 방법을 계속 찾아야죠. 잘 안 된 책은 빨리 잊으려고 애씁니다.”

그는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 중학교 2학년인 아들을 비롯해 조카에게 “요즘 뭐가 재밌느냐”고 자주 물어본다고 한다. “힐링 붐이 꺾였는데 그 다음은 뭐가 될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편집자들에게 ‘내일 칭찬 받을 책보다 오늘 팔릴 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출판사 라인업을 위한 구색 맞추기용 책은 내지 않습니다. 상도의를 지키면서, 잘 만들어서 잘 팔릴 책을 내놓는 게 제 역할입니다.”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모모·2022년)은….

급행열차가 탈선해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가 났다. 승객 127명 중 68명이 숨졌다. 소중한 이를 잃고 고통에 짓눌리던 이들은 어느 날 이상한 소문을 듣는다. 사고가 난 곳에서 가장 가까운 역인 니시유이가하마 역에 가면 유키호라는 유령이 나타나 사고가 난 그날의 기차에 오르게 해 준다는 것.

결혼을 앞두고 연인을 잃은 여성 히구치,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공사장에서 일하던 아버지를 경멸해 온 남성 유이치, 비 오는 날 우산을 씌워주고 도넛을 건넨 다카코 누나를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남학생 가즈유키, 사고가 난 열차 기관사의 아내 기타무라. 이들은 사고가 났던 기차에 오른다.   

다만 네 가지 규칙이 있다. 첫째, 죽은 피해자가 승차했던 역에서만 기차를 탈 수 있다. 둘째, 피해자에게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려서는 안 된다. 셋째, 사고가 난 곳에서 가장 가까운 역을 기차가 통과하기 전에 다른 역에서 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차에 오른 사람도 사고를 당해 죽는다. 넷째, 죽은 사람을 만나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애써도 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만일 열차가 탈선하기 전에 피해자를 하차시키려 하면 원래 현실로 돌아온다. 

책은 각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네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됐다.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가슴에 간직한 말을 건넨다. 각 에피소드 주인공은 다른 에피소드에도 등장한다.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 간신히 버티던 사람들은 떠나간 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조금씩 회복으로 나아간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반전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원제는 ‘西由比ケ浜驛の神樣(니시유이가하마 역의 신)’.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