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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운 세상에서 주목받는 ‘무해함’… ‘귀여움’ 전성시대

입력 | 2024-11-06 03:00:00

[트렌드 NOW]
작고 앙증맞은 소품에 열광…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에 끌려
상처 아물게 할 심리적 안전지대
독한 사회에서 생존 비결 될 수도



자이언트 판다 푸바오와 주키퍼(사육사)들과의 공개되지 않았던 순간을 담은 영화 ‘안녕, 할부지’ 포스터. 2020년 7월 국내 첫 자연 번식 판다로 태어난 푸바오는 귀여운 외모와 사랑스러운 행동으로 ‘무해한’ 매력을 뽐내며 열풍을 일으켰다. 삼성물산 리조트부문 에버랜드 제공


나의 이름이 곧 제목인 영화가 상영되고, 내 사진으로 만든 이모티콘이 판매 1위에 등극하고, 심지어 해외 팬들이 오직 나를 만나고자 비행기를 타고 찾아오는 정도라면, 해당 인물은 어마어마한 인기 스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누굴까? 바로 대한민국 ‘국민 아기’란 별명이 붙은 판다 푸바오다. 에버랜드에서 태어나 올 4월 중국으로 떠난 푸바오는 여전히 우리 곁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이런 인기는 푸바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강아지, 고양이, 앵무새 등 다양한 동물들이 각종 소셜미디어에서 사람 못지않은 팬덤을 누리는 중이다. 사람들은 이들을 보면서 “아, 귀여워!”를 연발하며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고 관련 제품을 구매하며 응원을 보낸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은 ‘귀여운 것 전성시대’다.

요즘 사람들은 어떤 것을 ‘귀엽다’고 표현할까? 우선 앞서 설명한 동물들이 귀엽다. 이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대체로 얼굴이 크고, 몸은 통통하다. 궁금한 표정을 짓는 등 때로 사람이 할 법한 행동을 하기도 하는데 그 반응이 사람과 유사할수록 귀엽다.

패브릭 디자인 스튜디오 ‘미물즈(MIMOOLS)’의 작은 햄버거 세트. 실용적인 리빙 패브릭으로 귀여운 존재들을 표현해 인기를 끌고 있다. 미물즈 홈페이지 캡처

또 사람들은 작은 존재를 보며 ‘귀엽다’를 외친다. 앙증맞기 짝이 없는 물건을 판매하는 회사 ‘미물즈’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작게 표현해 화제가 되고 있다. 햄버거, 콜라 등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사물을 초미니 핸드메이드 작품으로 만드는데 성인들의 애착인형으로 제격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월 서울 잠실에 오픈한 뽑기 매장 ‘가샤폰’은 산리오 캐릭터, 짱구, 먼작귀(먼가 작고 귀여운 녀석들) 등의 미니키링과 말랑말랑한 소형 장난감 스퀴시를 판매하는데 4월에 홍대점까지 오픈했다.

약간 서툰 행동을 할 때도 ‘귀엽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 유튜브에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외국 음식을 요리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몽글몽글 슬기로운 할매생활’ 콘텐츠가 인기를 끌고 있다. 중동 음식 후무스, 이탈리아 파스타 뇨키와 라사냐, 중국 요리 몐바오샤 등 어르신들이 평생 처음 들어보는 메뉴를 요리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제주 방언을 쓰며 라사냐 레시피를 읊는 모습이나, 메뉴 이름이 익숙지 않아 몇 번을 되물으면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귀엽다는 팬들이 많다.

이처럼 사람들이 귀엽고, 작고, 순수한 것에 열광하고, 애정을 쏟고 몰입하는 모습을 ‘무해력’ 트렌드라 부른다. ‘무해(無害)한’ 존재들이 사람들이 따르게 하는 준거력을 갖는다는 의미다.

‘무해’는 원래 식품이 ‘인체에 무해하다’에서 시작된 것인데 최근 들어서는 널리 사용되고 있다. ‘무해함(do-no-harm)’ 원칙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개발 과정에서 백신 안정성 원칙으로 적용됐었고, 인공지능, 자율주행 자동차, 생명과학, 환경보호 등 여러 영역에서도 윤리성의 핵심 기준이 되고 있다. 나아가서는 무해한 예능, 무해한 드라마, 무해한 조합, 무해한 2인자 등 여러 콘텐츠와 인물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용하는 용어가 됐다. 온라인 서점에서 ‘무해한’이라는 단어로 검색하면 ‘무해한 사람’, ‘무해한 인간관계’, ‘무해한 이슬람’, ‘무해한 돈벌이’ 등 수많은 책들이 소개된다. 가히 무해함 전성시대다.

사람들이 이처럼 다양한 면면을 가진 ‘무해력’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설적이게도 우리 공동체가 그만큼 ‘유해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요즘 젊은 세대는 스스로를 ‘긁힌 세대’라고 부른다. 뭔가 자존심이 상했을 때 ‘긁혔다’고 종종 표현한다. 긁히면 상처가 난다. 나에게 해를 끼치지도, 위해를 느끼게 만들지도 않는 무해한 존재들은 어쩌면 우리의 긁힌 상처를 아물게 해 줄 안전지대인 것이다.

무해력 열풍은 일부 젊은 세대들의 작은 취미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이 원하는 무해함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면밀히 탐구할 필요도 있다. 무해한 식품, 무해한 패션, 무해한 마케팅, 무해한 콘텐츠, 무해한 기술 등은 단지 귀엽다는 특성 이외에 새로운 개념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무해력은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비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미영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