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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문명의 뿌리 ‘히타이트’, 고대 인류의 흔적 엿보다

입력 | 2024-11-08 03:00:00

김해박물관 ‘튀르키예 특별전’
기원전 12세기 근동지역 강국
첫 성문 평화협정-황소모양 잔 등… 유물 212점 국내 처음 단독 전시
4m 길이 상형문자 탁본 눈길




황소와 염소, 여신 등 다양한 형태의 토기와 주전자 여러 점이 붉은 배경의 유리장 안에 전시된 모습.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케메트(고대 이집트)의 백성이 하티(히타이트)로 도망치거나 하티의 백성이 케메트로 도망친다면 그들을 돌려보낼 것이다. 그러나 그 백성들은 엄한 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

기원전 1258년경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 왕 하투실리 2세가 체결한 ‘카데시 평화조약’ 명문이다. 앞서 기원전 1274년 고대 오리엔트 세계의 패권을 놓고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카데시(현 시리아 지역)에서 맞붙었다.

두 강대국은 16년에 걸쳐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 승부를 짓지 못하고 세계 최초의 성문 평화협정인 ‘카데시 조약’을 맺었다. 튀르키예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조약 명문은 가로 13.8cm, 세로 17.6cm 크기의 점토판에 쐐기문자로 새겨져 있다. 전쟁 재발 방지나 포로 교환을 위한 인도주의 조치까지 적시돼 현대의 국제법 조문을 보는 듯하다.

6일 찾은 국립김해박물관의 ‘튀르키예 특별전―히타이트’ 전시에선 카데시 조약을 다룬 동영상이 흥미를 끌었다. 이번 전시에선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현 지명 보아즈칼레)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212점을 선보인다. 국내에서 히타이트를 단독으로 조명한 전시가 열린 것은 처음이다.

이번 전시는 경남 김해시와 튀르키예 초룸시가 지난달 자매도시 관계를 맺은 것을 계기로 열렸다. 유물 중에는 히타이트의 수준 높은 청동 제련 기술을 보여주는 정교한 청동갑옷 비늘과 날이 아직도 살아 있는 날카로운 청동톱 등이 단독 진열돼 눈길을 사로잡았다. 히타이트는 철기 문명을 발명했지만 무기와 검, 창 등 주요 기물에는 청동기를 주로 사용했다.

고대 국가 히타이트의 유물 ‘황소 모양 잔’은 다양한 신을 섬기던 히타이트인들의 종교적 관습을 잘 보여준다.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이 밖에 ‘황소 모양 잔’은 부리부리한 눈과 쫑긋 솟은 귀, 선명하게 뚫린 콧구멍 등 섬세하게 조각한 황소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신에게 술을 바치는 의식을 치를 때 사용된 이 잔은 황소를 신성시한 히타이트의 종교관을 보여준다. 전시 유물 중에는 황소뿐 아니라 염소, 여신 등 다양한 형태의 신을 표현한 토기들이 많다.

히타이트인들은 스스로를 ‘하티 땅의 1000명의 신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여러 신을 섬겼다. 특이한 건 자신들이 점령한 주변국들의 신상(神像)을 자국으로 가져와 신전에 모셨다는 것. 점령국에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신도 자유롭게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개방적인 종교관과 더불어 주변국들과 활발한 외교 관계를 맺어 오랜 기간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지배층이 사용한 쐐기문자와 전 계층이 사용한 상형문자로 구성된 히타이트의 언어 체계도 흥미롭다. 왕이 고위 관리에게 땅을 하사하는 토지 기부 문서, 하투샤의 왕이 하르삼나라는 도시의 왕에게 동맹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긴 편지 등이 기록된 쐐기 점토판이 전시 중이다. 히타이트인들은 모국어 외에도 쐐기문자로 8개 이상의 다양한 언어를 기록했다.

하투샤 유적 나산테페의 2번째 방에 있는 길이 4m, 높이 2m의 대형 상형문자 석조물을 김해박물관 직원들이 직접 뜬 탁본도 볼 수 있다. 탁본을 뜨는 데만 꼬박 1주일이 걸렸다고 한다. 히타이트 제국의 마지막 왕 수필룰리우마 2세가 신의 축복으로 새로운 땅을 정복했으며, 여러 장소에서 신들에게 제물을 바쳤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내년 2월 2일까지. 무료.


김해=사지원 기자 4g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