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뒤풀이-이성교제 마다하는 ‘런친자들’… “목표는 오직 완주”

입력 | 2024-11-09 01:40:00

[위클리 리포트] ‘러닝크루’ 열풍, 취재팀이 25km 달려보니
러닝크루 5곳 가입해 서울 곳곳 달려… 혼자 못 뛸 거리도 격려-응원 속에 완주
나이 상관없이 함께 뛰니 성취감 커져… 달리기 호흡법 등 노하우도 서로 전수
일부 ‘민폐’ 반응에 크루원들 자정 노력… 보행자 방해-고성 등 비매너 행위 자제
“규제보단 자연스러운 에티켓 정착 지원을”




《‘러닝크루’ 열풍, 그들이 달리는 이유

요즘 도심이나 한강변, 운동장 등에선 함께 모여 달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른바 ‘러닝크루’다. 혹자는 ‘왜 저렇게 무리 지어 달릴까’ 고개를 갸웃한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직집 그들과 함께 25km를 달리며 의문을 풀어봤다.》


“벌써 1km나 왔어요. 힘내세요!”

달리기 시작한 지 고작 10분여 지났을까. 같이 뛰던 러닝크루(달리기 모임) 회원들이 기자에게 외쳤다. 아직도 겨우 1km라니, 앞으로 3km나 남았다니. 저기 지나가는 자전거라도 훔쳐 탈까. 숨이 가쁘고 입안에서는 단내가 난다. 크루 운영진 이모 씨가 옆에서 재촉한다. “계속 뛰세요! 걸으면 더 힘들어요!” 속으로 곱씹었다.

‘아니야… 걸으면 편할 거야… 누우면 더 편할 거야….’

● ‘저들은 도대체 왜 같이 뛸까’ 너무 궁금해

3일 오후 7시가 넘은 시간 서울 마포구 홍제천 산책로. 러닝크루 일일 체험에 나선 기자의 머릿속에는 며칠 전 회사에서 오간 대화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20대 사이에서 러닝크루가 유행이라며?” 맞다. 러닝크루는 단연코 요즘 가장 핫한 유행이었다. 퇴근길마다 집 앞 한강공원에는 수십 명이 무리 지어 뛰어다니곤 했다. 26년 평생 운동이라곤 걷기와 숨쉬기가 전부던 한 친구가 갑자기 인스타그램에 ‘오런완!’이라고 해시태그를 달아 사진을 올리는 걸 봤다. ‘오늘 달리기(런·run) 완료’라는 뜻이었다. 궁금했다. 왜 이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트랙으로 뛰쳐나갈까.

3일 오후 7시 서울 마포구 홍제천 산책로. 기자가 일일 체험을 한 러닝 크루원들이 스트레칭을 한 후 ‘운동화 인증샷’을 촬영했다. 이날 해당 러닝 크루는 홍제천 일대를 4km가량 달렸다. 임재혁 기자 heok@donga.com

밤낮으로 달리는 ‘런친자들(달리기에 미친 자들)’의 심리가 궁금했다. 마침 “요즘 러닝크루가 젊은이들의 새로운 트렌드 같으니 직접 체험을 해보고 기사를 쓰자”는 이야기가 편집국 사회부에서 오갔다. ‘러닝크루 체험기를 보도하겠다’고 하자 주변 동료 기자들이 ‘살아 돌아오라’고 했다. 포털 사이트에서 ‘러닝 크루’를 검색하면 나오는 여러 카페들과 ‘당근’ 등 소모임 애플리케이션을 둘러보면서 규모가 큰 곳들 위주로 가입했다.

이후 1∼3일 사흘간 기자를 포함한 취재팀 4명은 2030 젊은이들이 주력인 러닝크루 5곳에 가입했다. 서울 홍제천, 당산 토끼굴, 한강공원 일대까지 그들과 총 25km를 달리며 25명의 크루원을 만났다. 때론 숨이 차서 중간에 서버릴까 한 적도 있었지만 취재팀 모두 정해진 코스를 완주했다.

● 혼자였다면 완주 못 했을 거리

3일 오후 6시 50분 서울 마포구 서울함공원. 현장에 도착하니 다른 크루원 4명이 이미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약 700m를 걸어서 홍제천 산책로 입구에 도착했다. 벌써 지친다. 마지막으로 뛴 게 세 달 전이었던가. “자, 이제 뜁니다!” 힘찬 함성이 들렸고 크루원들이 홍제천을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 5분까진 뛸 만했다. 1km를 6분 정도에 뛰는 크루원들의 속도에 맞춰 뛸 수 있었다. 그러나 10분, 20분이 지나자 고통이 찾아왔다. 가장 먼저 종아리 근육이 물 먹은 모래주머니처럼 무거워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인도를 벗어날 뻔했다. 다른 크루원 3명은 한참 앞질러 달리더니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졌다.

20분가량 뛰자 ‘이제 그만하고 크루에서 이탈해 기사나 쓰자’란 생각이 절실했다. 도망치려 하자 크루 운영진 이 씨가 바로 옆에서 그윽하게 바라보며 눈빛으로 채근했다. 기자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해주는 이였다.

“걸으면 더 힘들어요. 느려도 되니 본인 페이스대로 천천히 뛰세요.” 그는 호흡법을 가르쳐줬다. 두 번 들이쉬고, 두 번 내쉬고. 습습, 후후. 러닝크루가 아니라 혼자서 달렸다면 알 수 없는 노하우들이었다.

가르침을 들은 뒤 도주의 의사를 접고 그대로 더 달렸다. 2km 반환점을 지나자 뜀박질에 속도가 붙었다. 호흡이 안정되자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카디건 하나를 나눠 입고 산책하는 연인이 보였다. 세발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구르는 아이에게 환호하는 부모가 보였다. 저도 잘 뛰고 있습니다. 천변의 상쾌한 바람이 두 볼에 느껴졌다. 이 맛에 뛰는구나.

오후 7시 40분 마지막 500m가 고비였다. 함께 뛰던 이 씨가 말했다. “저 코너만 돌면 끝나요.” 그 코너까지 가자 또 말했다. “이제 마지막 100m예요.” 한 2, 3분 더 달리자 또 말했다. “진짜 마지막 100m 남았어요.” 무의식적으로 멱살을 잡으려던 찰나 종착지가 눈에 들어왔다. 출발점이었던 홍제천 돌다리였다. 정말 다 왔구나. 크루원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외쳤다. 골인!

1km당 9분. 러닝 고수의 눈에는 별 볼일 없는 기록이겠지만 자꾸 웃음이 나왔다. 목표를 이뤘다는 성취감이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앞으로 5km, 10km도 뛰어보고 싶었다. 더 멀리 가보자. 몽글몽글한 성취감을 가슴에 품고 집에 돌아오며 속으로 스스로를 격려했다. 그래, 단 한 번도 걸었던 적은 없었어. 뛰었지.

● “너는 나의 원동력” 서로 격려

1일 오후 서울 강서구 가양역 3번 출구 인근에서 ‘강서해피런크루’가 달리기 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날 기자를 포함한 강서해피런크루 회원들은 가양지하차도 인근 염강 나들목까지 2.5km 거리를 왕복해 달렸다. 이들은 달리는 내내 코스를 이탈하지 않도록 하는 등 시민 안전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조영우 인턴기자 경희대 경제학과 졸업

성취감은 러닝크루 활동의 가장 큰 동력 중 하나다. 같은 거리, 같은 시간을 달려도 함께 달릴 때 성취감은 두세 배로 커진다. 서울 강서구의 한 러닝크루에서 6개월째 활동 중인 회사원 김원태 씨(32)는 “홀로 달릴 땐 지치고 외롭지만 10명이 달리면 성취감도 10배”라면서 “크루원들과 함께 완주하고 기록을 깼을 때 그 희열이 너무 크다. 이젠 혼자서 뛸 수가 없을 지경”이라고 말했다.

혼자 뛸 때보다 좋은 기록을 낼 수 있다는 점도 러닝크루의 장점이다. 지칠 땐 크루원들이 옆에서 격려를 해주고 페이스를 조절해주며 완주를 돕는다. ‘강서해피런크루’ 3년 차인 박정호 씨(31)는 “다 같이 뛰면 ‘저 사람도 하는데 나도 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든다. 혼자 뛸 때보다 1km는 더 멀리 갈 수 있어 성취감이 배로 든다”고 말했다. 러닝크루 경력 7개월 차 대학생 박현일 씨(26)는 기자와 함께 양천구 용왕산근린공원 트랙에서 1km를 뛰었다. 1km를 3분 만에 주파한 박 씨는 한참 뒤에 따라온 기자에게 음료수를 건넸다.

“저도 4월에 처음 시작할 땐 500m도 뛰기 힘들었어요. 같이 계속 뛰다 보면 잘 뛰게 되니 자주 나와서 같이 뛰어요.”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죽진 않았잖아요? 한층 더 강해졌을 뿐입니다.”

그는 다음 주에 용왕산근린공원을 다시 뛸 거라고 했다. 이번엔 2km를 뛸 예정이란다. “저도 같이 뛸게요”라는 대답이 무심결에 나온 것은 동료애의 힘이었다.

● ‘런라니’가 되지 말자… ‘민폐’ 막을 자정 노력

젊은이들의 러닝크루 활동이 늘어나면서 일각에서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여러 사람이 단체로 달리다 보니 주변 시민이나 행인들 입장에서는 불편함을 느끼는 상황이 종종 생긴다. 단체로 뛰면서 자전거 도로나 보도 등을 침범한다는 이유로 “런라니(런+고라니)들!”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취재팀이 만난 대부분의 크루원은 시민의 불편에 공감하고 있었고 민폐를 최소화하려 노력했다.

3일 오전 서울 양천구 신목동역 인근 안양천 희망교에서 러닝 크루 회원들이 기자와 함께 5km 코스를 달리고 있다. 크루 회원들은 숨을 몰아쉬는 기자에게 ‘천천히 뛰어도 된다’고 격려했다. 완주할 때까지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자청하기도 했다. 박성배 인턴기자 중앙대 소프트웨어학부 수료

189명 규모의 러닝크루 ‘안양천 홍두깨’ 를 8개월째 운영 중인 크루장 이창훈 씨(33)는 “크루원들이 길을 막거나 크게 소리를 지르는 등 행위를 하면 즉각 제지한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우리 열정이 소중한 만큼, 시민들의 불편도 최소화하자는 게 원칙”이라고 말했다. 이어 “보행자에게 피해를 끼치는 민폐 러너는 가차없이 탈퇴시킨다”고 했다. 실제로 이 씨는 트랙을 달리는 내내 크루원들에게 손짓을 하며 시민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이성 교제를 목적으로 러닝크루에 가입하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정말일까. 취재팀 중 한 명에게 “러닝이 끝나면 끝나고 다 같이 술 먹자고 해봐라”라고 지시했다. 오후 10시쯤 ‘크루원들에게 혼났습니다 씨알도 안 먹히네요ㅠㅠ’ 카톡이 날아왔다. 대부분 러닝크루는 달리기만을 위한 모임이라고 한다.

서울 영등포구의 한 러닝크루 회장 이모 씨는 “우리 모임은 술자리를 절대 갖지 않는다. 회식을 열면 정말 달리기만 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부담을 느낀다”면서 “헬스장에 오면 헬스만 하는 것처럼, 순수하게 달리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한다”고 말했다.

● 40대 이상도 뛸 수 있어요… “이야기도 잘 통해”


현장에서 살펴본 결과 러닝크루는 2030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초저녁 가로등 불빛에 흰머리를 날리며 달리는 노년의 러너들이 많았다. 트랙이나 산책로를 달리는 10명 중 2, 3명은 중장년층이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인근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산크루’ 김성종 씨(42)는 “나이와 무관하게 달리기라는 관심사로 모인 것이 너무 좋다. 스물한 살과 마흔여섯 살뿐 아니라 70대 노인분들도 함께 뛰며 농담도 한다”고 말했다. 수학학원 강사 이재천 씨(48)도 “젊은 사람들이 많아 주저했는데, 막상 같이 뛰어 보니 이야기가 잘 통해서 재밌다”고 말했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며 아예 나이를 서로 공개하지 않는 러닝크루도 있다. 러닝크루 ‘걷뛰걷뛰’에서 활동하는 정모 씨는 “우리 크루는 아예 이름, 나이 등 인적사항을 공개하지 않고 닉네임으로만 부른다. 내 닉네임은 제이제이(JJ)”라면서 “내가 몇 살이든 상관없이, 달리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만 남아 있는 것 같아 자유로운 기분이다”라며 웃었다.

딸과 함께 산책을 나왔다가 우연히 본 러닝크루에 가입한 중년도 있다. 2일 서울 강서구 안양천 인근에서 러닝크루 체험을 하던 기자에게 한군탁 씨(48)가 말을 걸어 왔다. “혹시 러닝크루 같은 건가요.” 그는 운동 일정과 준비물 등을 물었다. 직업이 수의사라고 밝힌 한 씨는 “마라톤을 뛰어 보고 싶은데 나이가 많아 여태 고민만 했다”고 털어놨다. 10분 뒤 크루 단톡방에 들어온 한 씨는 “열심히 달리겠다”라는 첫 인사를 건넸다. 달리‘겠’다의 ㅆ 받침이 마치 달리는 사람의 다리처럼 보였다.

● “자연스러운 러닝 에티켓 정착되도록 지원”

게티이미지코리아

달리기 문화를 장려하려는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논의도 이뤄지고 있다. 청년들의 건강한 운동 문화라는 측면에서 러닝크루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1일 서울시의회에서 열린 청년정책포럼 ‘러닝크루를 통해 바라본 청년문화’에서 최호정 서울시의회 의장은 “러닝크루와 같은 청년 주도형 문화가 서울을 외롭지 않은 도시로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시 체육진흥과는 광화문광장 등 시내 야간 명소를 달리는 ‘7979 서울 러닝크루’를 직접 운영하고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시민 불편을 이유로 러닝크루의 출입을 막거나 자제시키는 곳들도 있다. 경기 화성시는 동탄호수공원 산책로에 러닝크루의 출입을 자제해 달라고 권고했다. 서울 서초구는 반포종합운동장 내에서 5인 이상 단체 달리기를 제한하는 이용규칙을 시행 중이다. 송파구 역시 석촌호수 산책로에서 3인 이상 달리는 것을 자제해 달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장기적으로는 러닝크루의 자정 노력과 서로 배려하는 문화가 정착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신인철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교수는 “러닝크루 논란은 청년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겪는 사회적 몸살에 가깝다”며 “이를 규제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에티켓이 정착되도록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임재혁 기자 heok@donga.com
이정숙 인턴기자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졸업
박성배 인턴기자 중앙대 소프트웨어학부 수료
조영우 인턴기자 경희대 경제학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