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가 울고 있다.
귀뚜라미가 울고 있다.
가을을 가져다 놓고
저렇게 저렇게 굴리어다 놓고
둘러 앉아서
모두들 둘러 앉아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다.
귀뚜라미가 울고 있다.
(중략)
휘영청히 달밝은 사경야 밤에
자지도 않고
모두들 둘러 앉아서
소매 들어 흐르는 콧물을 씻어가며
저렇게 저렇게
귀뚜라미가 울고 있다.
귀뚜라미가 울고 있다.
―이원섭(1924∼2007)
곤충이 무서워도 귀뚜라미 하나만은 좋아한다. 그것은 예외일 수밖에 없다. 시인에게 가장 친근한 곤충이기 때문이다. 고대의 시경이며 조선의 시조에서는 ‘실솔’이라는 이름으로, 그 이후에는 귀뚜리나 귀뚜라미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왔다. 게다가 귀뚜라미는 피노키오를 걱정해 준 착한 친구였다. 시인의 친구이며 피노키오의 친구를 싫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귀뚜라미는 쓸쓸한 가을밤에 찌르르 운다. 그리움이나 고통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의 곁에서 운다. 사실 귀뚜라미가 가을과 슬픔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괴로운 가을밤에 종종 듣게 되는 소리가 귀뚜라미 소리다. 그래서 우리는 귀뚜라미에게서 ‘웃음소리’를 떠올리기 어렵다. 한밤 내 들리는 그 소리는 유독 울음으로만 해석된다.
이원섭 시인의 귀뚜라미는 우는 귀뚜라미 중에서도 특히 더 우는 귀뚜라미이다. 얼마나 우는지, 모두 같이 둘러앉아 콧물을 흘려가며 운다. 이 작품은 1953년에 피란 가서 쓴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저들이 왜 우는지 우리도 짐작할 수 있다. 지구상에 전쟁이 그치지 않으니 어디선가 저 귀뚜라미는 아직도 울고 있겠다.
나민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