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화재 199건, 피해 65만원” 갈수록 손해액 큰 대형화재 늘어… 공장 밀집했던 창신동 빈도 높아 1925년 첫 상설 ‘경성소방서’ 생겨 일제, 군중 동원해 소방훈련 홍보… 중일전쟁 도발후엔 군사훈련 색채
1929년 2월 매일신보를 통해 보도된 경성극장 화재 모습. 건물이 전소돼 이듬해 극장을 신축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1940년 1월 경성의 월간 화재 손해액은 50여만 원에 달했다. 겨울의 한가운데인 1월은 언제나 화재가 가장 많은 달이다. 하지만 1940년은 아주 이례적이었다. 전년 같은 달에 비해 손해액이 거의 5배나 되었기 때문이다. 화재가 상대적으로 적은 해라면 근 1년 치 손해액에 맞먹는 거액이었다. 이는 구용산 경정(京町·현재 용산구 문배동)의 태양제유회사 화재 손해액이 45만 원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이 화재를 두고 ‘매일신보’는 경성의 도시화가 진전되어 점차 공장과 고층 건물이 증가하면서 화재도 대형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매일신보’·1940년 2월 3일). 당시 총독부 소방 당국은 손해액 5만 원 이상의 화재를 ‘특수 화재’로 분류했는데, 1940년 한 해에만 태양제유회사 화재를 비롯하여 특수 화재가 여섯 건이나 발생했다(조선소방협회 기관지 ‘조선소방’·1941년 4월호).》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경성의 일관된 화재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몇몇 부분적인 통계를 모아 보면 경성의 도시화와 화재 발생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1914년은 화재 건수는 171건, 손해액은 10여만 원인 데 반해 1935년은 199건, 65만여 원이다(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통계자료집’·1993년). 건수의 증가보다 손해액의 증가가 두드러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형 화재가 증가함을 알 수 있다.
1935년 3월 ‘일본 육군 기념일’에 즈음한 종로 소방훈련 풍경. 경성휘보에 실렸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소방훈련의 군사적 성격은 더 강화돼 갔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이전과 다른 도시적 생활 양식도 새로운 화재 대비의 필요성을 불러왔다. 1930년대 들어 경성에는 집합 주거 형태인 아파트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1937년 1월 명치정(明治町·현 명동) 아파트에서 화재로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의 방화 규정과 방화 설비 등을 마련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여관에 대하여는 취체규칙(단속규칙)이 있는데 여관과 거의 흡사한 상태로서 그 위에 연로한 사람과 어린이들이 잡거하여 가지고 각 실에서 취사를 하여 위험성이 많은 아파-트에 대하여서는 하등 취체가 없는 것은 자못 고려하여야” 하며 “아파-트는 각 호의 집합체이니까 전후좌우상하의 이웃집에 영향이 미치지 않도록 각 호의 벽은 기어코 내화구조의 건축으로 하여 두지 않으면 안될 것”이고 “현재 아파-트의 높은 층에 거주하고 있는 인사는 만일의 경우에 여하한 방법으로서 피난할 수가 있을까를 미리부터 연구하여 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매일신보’·1937년 1월 13일).
1925년 신설됐던 경성소방서의 청사 신축을 알리는 1937년 매일신보 기사. 새 경성소방서 청사는 광복 후 서울 중부소방서 청사로 사용되다 철거됐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멀리 북간도 지방으로 나아가 훈춘 성내 외에 근거를 닦고 이역풍상의 허다한 간난신고를 겪으며 상공업에 근면 열심하여 일종 무형한 큰 세력을 잡고 있는 재훈춘 조선인 동포는 항상 교통의 불편으로 인하여 조선 내지의 형편을 자세히 목격할 기회가 자연 적어 7, 8년 내로 일취월장하는 조선 사정을 알지 못함이 큰 유감”이었는데 “경무총감부에서는 시찰단 일행에게 구경시키기 위하여 경성소방대를 소집하여 총감부 광장에서 소방 시범을 거행하기로 준비를 정돈하고” “이어 오구마 주임 경부가 여러 가지 기교한 소방기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 후 소방대의 활동을 시작”하자 시찰단은 “물을 뿜는 것이며 소방자동차와 증기펌프에 활발 기민한 활동에 모두 경탄하기를 마지아니하였으며 어떤 단원은 저와 같이 인민의 생명, 재산을 위하여 설비를 완전히 하였음은 실로 꿈 밖이라고 탄식”했다(‘매일신보’·1918년 5월 5일). 일제가 소방 훈련의 시연에서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는지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정기 소방 훈련 중 1928년 추계 훈련은 기억할 만하다. “경찰부 보안과에서는 오는 12월 3일 오전 10시부터 부내 훈련원 광장에서 추계 소방점검 및 대연습을 거행하”기로 했는데 “당일은 각 관계자와 기타 관민 다수를 초대하고 경성소방서 및 소속 소방조원에 대한 점검이 있고 이어서 분열행진이 있은 후 그 다음으로 연습에 들어가 ‘비행기 습래(襲來) 폭탄 투하로 인한 이재 가옥의 인명 구조 및 화재 방어법’이라는 연습을 개시하여 훈련원 앞에 시설하여 놓은 100척여 4층 가옥에 폭탄이 떨어져 불이 일어난 것을 구조대(救助袋)와 구조막(救助幕)과 밧줄 및 사다리로 웃층에 있는 아해와 부녀 등을 구출하는 기발하고도 아슬아슬한 광경을 실연”할 것이었다(‘매일신보’·1928년 11월 26일). 경성에서 소방 훈련에 일종의 ‘민방위 훈련’의 요소를 가미한 첫 훈련이었다. 이런 식의 훈련은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한 이후에는 더욱 대규모로 거행되었다. 1937년 추계 소방 훈련은 참가 인원만 이전의 두 배에 가까운 430명에 이를 정도로 대대적으로 추진했다(‘조선소방’·1937년 11월호). 이제 소방은 순수한 화재 대응 활동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미 벌어진, 또 다가오는 전쟁에 대비한 군사 활동의 색채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