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세 ‘거리의 피아니스트’ 지성철 씨 충청 지역 대표 실버 뮤지션 ‘실버마이크’ 통해 대중적 재즈 연주 선천성 시각장애 딛고 음악활동 첫 작곡에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 “노년, 예술 즐기기에 딱 좋은 나이”
피아노 연주 중인 지성철 씨. 그는 사진 촬영을 위해 이파노 앞에 앉아줄 것을 요청하자 “포즈만으론 어색해서 안된다”며 ‘베사메무초’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두번째 곡은 사진기자의 신청곡인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이었다. 수원=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일 오후 5시 충북 청주시 오창호수공원 야외공연장. 점차 어둠이 내려앉고 늦가을의 찬 기운이 스며들 무렵, ‘지토벤’이란 애칭으로 불리는 재즈 피아니스트 지성철 씨(65)의 무대가 시작됐다.
계단식 관객석을 채운 100여명의 시민들이 쏟아낸 환호와 함께 그의 손이 건반 위를 날아다녔다. 올드팝부터 대중가요, 클래식 소품의 친숙한 곡조들이 화려한 재즈의 선율로 변신해 공중에 울려퍼진다.
● 20대, 생애 첫 작곡으로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
그가 세상에 알려진 계기는 1986년 난생처음 작곡한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유열)’가 MB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으면서다.
“유열 씨와의 첫 만남은 우연이었죠. 저는 그 무렵 압구정동 한 카페에서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손님 중 한 분이 제 반주로 ‘마이웨이’를 부르고 싶다고 청해왔어요. 평소 반주하는 걸 싫어하는데 이상하게 그 날은 해주고 싶었어요. 노래를 참 잘 부른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그 손님이 유열이었어요. 비슷한 또래이니 친구가 됐지요.”
한달 쯤 뒤 유열이 대학가요제에 나가고 싶으니 곡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해왔다.
가수 유열이 노래하고 지성철 씨가 반주하는 공연장면. 유튜브 캡처
1989년에는 대학가요제 금상곡 ‘사랑은 이별을 위해(이은영)’와 동상곡 ‘그대 떠나도(이재영)’를 작곡해 한때 ‘가요제 전문 작곡가’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2011년 지성철 씨와 유열 씨의 공연 포스터.
유열 씨는 6년 전부터 폐섬유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최근 폐 이식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다. 그에 앞서 모친상을 당했지만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중했다.
“(유 씨는)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절제하는 사람인데 어쩌다 그런 병에 걸렸는지.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요. 하루빨리 완쾌 소식이 들려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유열 씨와 공연을 많이 한 것 같은데, 타격은 없었나요?
● 아들의 장애 이겨낸 어머니의 투쟁
피아노를 배운 계기를 묻자 길고긴 사연이 쏟아져나오는데, 고비고비마다 그의 어머니의 고민과 사랑이 읽혔다. 지 씨는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성 백내장’ 진단을 받고 초등학교 입학 전에 7차례나 눈수술을 받았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제가 첫돌 조금 지나 눈수술 받고 병원에 누워 있었는데 침대 난간을 두드리며 노래를 하더래요. 옹아리가 아니고 제법 음정과 박자가 있는 노래였다고, 그래서 ‘이 아이는 무조건 피아노를 가르쳐야겠다’고 마음 먹으셨다고 합니다. 본인이 여고 합창단 솔리스트 출신이라 그런 감이 오셨다고요.
눈이 불편한 제 앞날을 걱정해 뭐라도 다른 재능을 키워주고 싶으셨던 거겠죠. 어머니는 제가 5살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려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학령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모두가 지 씨가 갈 곳은 맹학교라고들 했지만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종로구 효자동에 있던 맹학교 입학원서를 써놓고도 장안의 안과를 다 뒤졌대요. 무교동 공안과에서 최종산 박사님을 만나 6번째, 7번째 수술을 받았는데 다행히 성공한 겁니다.”
덕분에 시야가 조금은 확보됐다. 초등학교 반배정이 다 끝난 시기였지만 교장을 찾아가 읍소해 겨우 입학했다. 이후 용산중학교를 거쳐 서울예고로 진학했다.
―지금 시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오른쪽은 0.08 정도, 왼쪽은 망막박리로 시력이 없어요. 한쪽 눈으로도 잘 살고 있습니다.”
형과 형수, 조카와 함께 한 20세때의 지성철 씨(서 있는 사람). 본인 제공
실버마이크 활동을 통해 알게 된 뮤지션들과 함께 한 지 씨 부부(가운데 두 사람). 부부의 왼쪽은 금산실버마이크 리코더 연주자, 맨 오른쪽은 3년째 지 씨와 함께 실버마이크 공연중인 클래식 기타리스트 김광식 씨. 지 씨는 그를 ‘사려 깊고 의리 있는 친구’라고 격찬했다. 지성철 씨 제공
근 30년 해로한 부인과 함께. 부인은 지 씨의 운전과 스케줄 관리 등 손발 역할을 해줬다. 두 사람은 자녀는 갖지 않았다. 지성철 씨 제공
―‘지토벤’이란 애칭은 언제부터…
“1990년대말 경, 유열 씨하고 대구 공연을 갔는데, 관객석에서 이례적으로 피아노 연주 신청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제가 즉석에서 신청곡을 받았더니 유 씨가 하는 말이 ‘여러분 베토벤 잘 아시죠? 베토벤하고 비슷한 친구입니다. 지토벤입니다’라고 추켜세워 줬습니다. 듣기가 썩 나쁘지 않아서 이후 계속 써먹고 있어요. 하하.“
서울예고는 피아노가 아니라 성악으로 입학했는데, 대학 입시를 한 달 앞두고 ‘신경성 성대 경련증’이란 병이 찾아와 또다시 좌절을 맛봤다. 지금도 그는 일상적인 대화때에도 발성이 자연스럽지 않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치면서 ‘내 음악을 연주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어요. 혼자 세계적 피아니스트들의 곡을 듣고 즉흥 연주 공부를 했지요. 국내 대학에는 그런 걸 가르치는 곳은 없더군요. 그러다가 재즈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1980년 당시 무교동에 유명한 클럽이 많았어요.”
하루 30분짜리 연주를 3차례씩 했는데 보수는 일반 회사원의 두 배가 넘었다.
“내 음악을 연주하는 즐거움을 매일 느꼈습니다. 다른 일 할 생각 없이 ‘지금 이 생활이 너무 좋다’는 충만감을 가지고 지냈지요.”
● 60세 넘어 실버마이크 프로그램에서 힘 얻어
실버마이크 무대에서 공연 중인 지성철 씨. 실버마이크 제공
달변은 아니어서 마이크를 쥐어주면 쑥스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실버마이크 제공
“3년 전부터 5월~11월 사이엔 실버마이크(충청권) 공연에 주력합니다. 지역문화진흥원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인데 매월 마지막 수요일인 ‘문화가 있는 날’ 주간에 야외공연이 집중됩니다. 저는 올해 10번 무대에 섰습니다.”
‘실버마이크’ 사업을 통해 숨어있던 실버예술가들의 존재감이 빛나게 됐다. 다만 이들은 매년 엄격한 오디션을 통해 실력과 기량을 인정받아야 무대에 설 수 있다.
충청권 실버마이크를 관장하는 문화기획사(문화충동)에 따르면 그는 현장에서 신청곡을 받아 즉흥연주를 하는 등 관객 중심의 무대를 진행해 호응이 매우 좋다고 한다.
“공연에서 늘 제가 맨 끝 순서라 앙코르도 한두곡 씩 합니다. 제게는 관객과의 소통이 가장 즐겁습니다.”
모든 일을 혼자 헤쳐가야 하는 답답한 상황도 실버마이크가 풀어줬다.
“그동안 공연장 섭외부터 홍보, 티켓판매까지 모든 과정을 제가 직접 했어요. 당연히 효율도 떨어지고 전문성도 부족하죠. 실버마이크 활동을 하면서 참 많이 배웠습니다. 내년부터는 정부나 지자체 문화재단 등의 지원을 챙겨 광고도 하고 공연도 제대로 할 생각입니다.”
유럽 등 문화선진국에서는 어디를 가나 쉽게 진짜 예술을 향유하는 환경이 조성돼 있다. 우리도 이같은 시도가 이뤄지는 건 반가운 일이다.
● 나이 드니 ‘찾아가는 공연’하게 돼
실버마이크가 다른 거리 공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청남대에서 월 4회 정기 연주 의뢰가 들어왔고 공연을 보러 왔던 금산여고 교사는 11월 하순 학교 연주를 요청해왔다.
“5교시에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연주를 듣게 됩니다. 문화체험 수업이겠죠. 보수를 떠나 학생들에게 제 음악을 선물한다는 게 기쁩니다.”
요즘 지 씨는 ‘청춘마이크’ 참가자인 예술가와 콜라보 무대를 선보이고 아이돌 그룹 뉴진스의 ‘버블검’을 재즈곡으로 연주하는 등 젊은 층과의 소통에도 열심이다.
―최신 아이돌 곡도 소화하시던데 연습을 얼마나 하신 건가요.
“어떤 곡이건 세 번 정도 들으면 연주할 수 있어요. 평소 연습은 손 푸는 정도만 합니다. 즉흥 연주다 보니까 집에서 연습을 해버리면 실제로 공연할 때 김이 빠지거든요.”
수원의 공연장 윤아트홀 카페에서. 종종 이곳을 대관해 공연을 가졌다는 그는 이날도 연말 공연 협의차 이곳을 찾았다. 수원=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연주는 체력도 필요한 일인데….
“전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피아노 앞에만 앉으면 그냥 100%가 나와요. 저도 불가사의라고 생각할 정도예요. 주변 사람들도 일단 피아노 앞에 앉으면 사람이 달라 보인다고 하더군요.”
―60대의 음악은 젊은 시절과 어떻게 다릅니까.
“예전엔 보여주는 공연을 많이 했습니다. 화려한 테크닉을 앞세웠지요. 이제는 진솔하면서 내공이 꽉 찬 공연으로 바뀌고 있다고 저 스스로 느낍니다. 또 젊을 때는 사람들이 저를 불러줘서 공연을 했는데 이제는 제가 스스로 찾아가는 공연을 해야 해요.
음악가가 나이가 들었다고 재능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 봐요. 오히려 연륜이 가져다주는 깊은 맛이 추가되지요. 실버마이크에 참여하는 다른 분들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오랜 세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기량을 갈고닦아온 분들이어서 그 깊이가 다릅니다.”
● 노년은 예술 즐기기에 딱 좋은 나이
그의 공연은 주로 행사 끝에 배치돼 야외공연에선 주변이 깜깜해진 뒤의 무대가 된다고. 지성철씨 제공
사실 공연자도 듣는 이들도 ‘같이 늙어가는 처지’다.
“시니어들께 젊은 때 바빠서 즐기지 못했던 예술을 다시 찾아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여러모로 여유가 생기는 노년은 예술을 공부하고 즐기기에 딱 좋은 나이입니다.”
―재즈라도 주로 대중적인 곡을 연주하시네요.
“음악은 기분 좋고 힐링되고 감동받으려고 듣는 건데 생판 모르는 곡을 들으면 계속 집중해야 해서 스트레스를 받기 십상입니다. 저는 귀에 익은 곡에 제가 가진 영혼을 투자해 ‘그 곡이 이렇게도 변하는구나’하고 감탄하시도록 연주하고 싶어요.”
그의 유튜브채널 ‘지토벤 음악다방’에는 직접 연주한 곡들이 적지 않게 올려져 있다. 예컨대 ‘엘리제를 위하여’의 재즈풍 연주는 조금은 껄렁한 듯, 묘한 맛과 재미가 있다. 동요인 ‘학교종’도 상당히 멋스러운 재즈곡으로 변신한다. 최근에는 독집 연주 음반을 준비하는 한편으로 세미 트로트 가요 작곡에도 손대고 있다고.
그가 쓴 트로트곡 ‘인생 그림’은 자신의 이야기이자 실버세대에 대한 헌사다.
‘강물 같은 시간 속에/지난 날 되돌아보면/고된 날도 많았지만/내가 너무 잘 살았구나…중략…앞만 보며 걸어가요/멋진 꿈이 거기 있어요/아름다운 내 인생그림’.
65세 실버뮤지션 지토벤이 그려 나갈 인생 그림이 기대된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