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에스파. SM엔터테인먼트 제공
걸그룹 에스파의 ‘위플래시(Whiplash)’를 듣고 영어 위플래시에 ‘채찍질’ 말고 다른 뜻이 있는 걸 알았다. 의학용어로 편타성(鞭打性) 손상, 즉 채찍으로 맞은 것 같은 부상이다. 챗GPT는 “교통사고나 급격한 충돌로 인한 목과 척추 부상. 특히, 차가 뒤에서 충돌했을 때 머리와 목이 빠르게 앞뒤로 흔들리면서 발생하는 손상”이라고 했다. 왜 이 노래 안무에 윈터 카리나 지젤 닝닝이 목뒤를 한 손으로 잡고 팔을 치켜드는 반복 동작이 있는지 알겠다.
이 단어를 더 쉽게 이해하려면 19세기 미국 남부 흑인 노예들 삶을 다룬 TV 드라마 ‘뿌리’(1977년)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2012년 영화 ‘장고: 분노의 추적자’를 보면 된다. 농장주가 나뭇가지에 양팔이 묶인 흑인 노예 등에 채찍질을 가한다. 극심한 고통과 충격에 노예 머리가 뒤로 세게 젖혀졌다가 앞으로 푹 숙여진다.
위플래시 얘기를 장황하게 한 것은 에스파를 좋아해서만은 아니다. 우리나라 정치에 위플래시가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국민이 정치인을 채찍으로 내려치자는 뜻이 아니다. 국민이 정치에서 위플래시를 느끼게 해 줬으면 좋겠다는 얘기다. 이미 한 번 대통령을 탄핵해 봤는데 두 번째 탄핵이 큰 충격으로 다가올 리 만무하다. 솔직히 배부르고 등 따스한 정치인들 응석받이 노릇을 하는 것이 지금의 탄핵 놀음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는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사명(使命)을 잃어버린 것 같다. 상실한 사명을 새롭게 제시하는 것은 정치(가)의 몫이다. 미국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30여 년 전 쓴 책 ‘역사의 종말’의 주제는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에 마침내 승리했다’가 아니다. 후쿠야마가 강조하는 바는 이 책의 부제 ‘역사의 종점에 선 최후의 인간’에 있다고 본다.
후쿠야마가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용어를 빌린 ‘최후의 인간’은 “육체적 안전과 물질적 풍요”에 젖은 삶을 산다. 행복한 스스로에 만족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힘쓰지 않는다. 이른바 거대 담론도, ‘신성한’ 목표도 사라지고 세세한 욕망의 충족만 남는다. 지금 정치도 마찬가지다.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나 가치는 온데간데없고, 시야는 내부로만 고정돼 알량한 권력 잡기에 매달린다.
선방(禪房)을 쩌렁쩌렁 울리는 할(喝) 같은 위플래시를 기다린다. 지도자를 꿈꾸는 정치인들에게 묻고 싶다. “Just close your eyes, breathe in and visualize.”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체적인 비전이, 사명이 떠오르는가. 그럼 당신이 “오직 이 판을 바꿀 changer”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