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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 잡아주시면 2만 원 드려요” 하찮은 벌레가 왜 이리 무서울까?[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입력 | 2024-11-16 14:00:00


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들을 메일(best@donga.com)로 알려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벌레, 새 등 그 실체에 비해 과도한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도대체 왜 이런 공포가 생겨났고, 완화할 방법은 없을까. (사진은 기사와 직접 관계없음) ‘EBS 다큐’ 유튜브 화면 캡처


바퀴벌레 공포증이 있는 직장인 김아영 씨(28·가명)는 집에 방역업체를 수시로 부른다. 어릴 때 얼굴로 바퀴벌레가 날아와 부딪힌 경험 이후로 바퀴벌레만 보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택배 상자에 바퀴벌레가 숨어 들어올 가능성에 대비해 택배는 무조건 현관문 밖에서 뜯고 내용물만 가지고 들어온다. 자는 동안 바퀴벌레가 입이나 귀에 들어가거나, 온몸에 기어다니는 상상을 하면 끔찍해서 잠이 안 온다. 자취를 시작한 이후 바퀴벌레가 나온 날은 친구 집에서 자고 온 적도 있다.

벌레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집에서 벌레가 발견되면 ‘얼음’이 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기도 한다. 실제로 중고 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에는 ‘바퀴벌레 잡아주실 분’을 구하는 글이 수시로 올라온다. 보통 출동 1건당 1만 원에서 2만 원 사이에 시세가 형성돼 있다.

맨손으로 벌레를 때려잡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유난스럽다고 느껴질 수 있겠지만, 이들에겐 진지한 얘기다. 꼭 벌레뿐 아니라, 새, 쥐, 뱀, 개 등 공포 대상이 다양할 수 있다. 특정 상황에 놓이는 것을 무서워하는 고소공포증이나 폐소공포증 등도 마찬가지다. 피해 다니면 그럭저럭 살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가 심해 일상생활이 불편하거나, 직업적 방해를 받는 정도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 특정 대상·상황에 비합리적 공포 느껴

특정 대상 또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과장되고 비합리적인 공포를 느끼는 것을 특정공포증(Specific Phobia)이라고 한다. 공포 대상이나 상황을 무조건 피하려고 하고,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엄청난 두려움을 느낀다. 물론, 이들도 자신의 두려움이 실제보다 과장됐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중고 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에 올라온 바퀴벌레 퇴치 요청 글. 화면 캡처


사람마다 특정공포증이 생긴 이유가 다르기에 두려움의 대상과 상황도 전부 다르다. 원래는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지만, 어렸을 때 몇 번의 불쾌한 경험이 각인되면서 두려움을 ‘학습’하는 경우가 많다. 앞서 김 씨가 어렸을 때 날아다니는 바퀴벌레가 얼굴에 부딪히는 경험을 통해 ‘바퀴벌레=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대상’이라고 학습한 것과 같다.

어렸을 때 개에 물린 경험이 개 공포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게티이미지


또 누군가가 특정 대상을 두려워하고, 피해 다니는 것을 보는 자체만으로도 공포증이 생기기도 한다. 바퀴벌레 공포증이 있는 어머니를 보고 자란 경우 그 자녀에게도 비슷한 증상이 생길 수 있다. 이때도 ‘바퀴벌레=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대상’이라는 학습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 특별한 경험이 없더라도 원래 공포를 잘 느끼는 기질을 타고났을 수도 있다.

특정공포증은 공포의 대상과 상황에 따라 몇 개의 하위유형으로 나뉜다. 엘리베이터나 비행기, 밀폐된 공간(폐소공포증)을 무서워하는 상황형이 가장 많다. 그 다음으로는 높은 곳에 올라가거나(고소공포증), 천둥·번개를 두려워하는 자연환경형, 피나 주사, 상처를 무서워하는 혈액-주사-상처형, 뱀이나 새, 벌레를 두려워하는 동물형 순으로 많다. 두 가지 유형이 함께 나타나는 경우도 흔하다.


◆특정공포증의 유형
·동물형
뱀, 곤충, 박쥐, 새, 쥐, 벌레, 고양이, 개, 거미

·자연환경형
천둥, 번개, 폭풍, 물(수영장·호수 등), 높은 곳

·상황형
비행기, 엘리베이터, 지하철, 좁고 밀폐되거나 어두운 공간

·혈액-주사-상처형
혈액, 바늘, 칼 등 날카로운 물건, 치과, 의사

●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특정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공포 대상과 맞닥뜨리거나 특정 상황에 놓이면, 끔찍한 해를 당할 것이라는 상상 때문에 강렬한 두려움을 느낀다. 예를 들어 동물에 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개나 쥐한테 물리거나, 새 또는 바퀴벌레에게 공격받는 상상을 한다. 또 비행기나 엘리베이터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타고 있던 도중 공중에서 추락하는 상상을 하고,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혼절해 균형을 잃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두려워한다.

그렇다고 특정 대상이나 상황을 무서워한다고 해서 전부 공포증 진단을 받는 것은 아니다. 특정 대상, 상황에 노출됐을 때 극렬한 두려움을 느껴 도망치려고 하고, 이런 행동이 6개월 이상 지속돼 사회적 활동이 제약되거나 직업에 방해가 될 때 진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벌레가 무서워 야외 활동을 극도로 꺼리거나, 비행기를 타지 못해 해외여행이나 출장을 못 가는 경우가 해당한다.

MBC 드라마 ‘우리, 집’의 최재진(김남희 분)은 혈액 공포증이 있는 성형외과 의사로, 수술할 때마다 패닉에 빠져 수술방에서 도망치는 심각한 문제를 겪는다. MBC 화면 캡처


특정공포증의 평생 유병률은 10~11%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한국인은 이보다 낮은 5~6% 정도라는 조사 결과가 있다. 특정공포증 증상을 겪는 사람은 많지만, 적극적으로 진단받고 치료에 나서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보통 여성이 남성보다 2배 많이 경험한다.

● 점진적으로 서서히 노출하면 공포 완화

특정공포증에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은 행동치료다. 이 가운데 노출 치료(exposure therapy)는 가장 많이 사용하는 치료 기법의 하나다. 두려운 대상이나 상황에 노출되는 경험을 통해 상상만큼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원리다. 노출 치료는 한 번에 강한 자극과 직면하는 홍수법(flooding)과 단계별로 서서히 노출 강도를 높여가는 점진적 노출법이 있다. 때에 따라 실제 상황에 노출하는 방법과 상상으로 노출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호주 그리피스대 응용심리학과 연구팀은 거미 공포증이 있는 성인 46명을 모집해 점진적 노출법을 활용해 공포증 치료를 시도했다. 이들에게 멀리서 거미를 보여주기 시작해 점차 강도를 올려 마지막 단계에서는 어깨에 올리는 것까지 시도했다. 물론 참가자가 원할 때 언제든 치료를 중단할 수 있었다. 총 16단계로 잘게 쪼갠 노출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거미에서 3m 떨어진 곳에 선다.
2. 거미에서 2m 떨어진 곳에 선다.
3. 거미에서 1m 떨어진 곳에 선다.
4. 닫혀 있는 거미 우리에 손을 얹는다.
5. 거미 우리에 손을 얹고 얼굴을 50cm 내로 가까이한다.
6. 거미 우리 문을 열고 거미를 본다.
7. 막대기로 거미를 조심스럽게 건드린다.
8. 권투 글러브를 끼고 거미를 만진다.
9. 권투 글러브 위에 거미를 올린다.
10. 라텍스 장갑을 끼고 거미를 만진다.
11. 라텍스 장갑 위에 거미를 올린다.
12. 맨손 검지로 거미를 만진다.
13. 맨손 위에 거미를 올린다.
14. 옷 입은 팔 위에 거미를 올린다.
15. 맨살이 드러난 팔에 거미를 올린다.
16. 맨살이 드러난 어깨에 거미를 올린다.

출처: 행동치료 및 실험 정신의학(Journal of Behavior Therapy and Experimental Psychiatry)
연구진은 위 치료를 진행하기 전에 실험참가자를 A, B, C 세 그룹으로 나눴다. 1단계에서 16단계에 이르기까지 A, B그룹은 노출 치료를 한 장소(예: 심리 치료실)에서만 진행했다. 반면, C그룹은 서로 다른 세 장소(예: 심리 치료실, 욕실, 야외 테라스)를 옮겨 다녔다.

치료 결과 1명을 제외한 모든 참가자가 노출 치료를 통해 16단계까지 성공했다. 치료가 끝난 직후 이들이 거미를 대했을 때 느끼는 주관적 고통 수준, 심장박동, 도망치고 싶은 정도를 검사했더니, 세 그룹 모두 치료 전보다 지표들이 월등히 완화됐다.

● 장소 바꿔가며 시도해야 효과

그러나 노출 치료의 즉각적 효과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꽤 많다. 치료실을 나가서 새로운 환경에서 공포 대상과 만나면, 다시 얼어붙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진은 치료받을 때부터 장소를 바꿔가며 노출을 진행하면 공포가 덜 재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서 C그룹의 치료를 서로 다른 3곳에서 진행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예상대로 C그룹에서 치료 효과가 오래 지속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연구진은 치료 1주와 4주 뒤에 이들을 불러서 거미 공포증을 다시 검사했다. 조건별로 대조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A, B, C 그룹에 각각 다른 조건을 할당했다.


·A그룹: 한 장소에서 치료받고, 같은 장소에서 공포증 후속 검사
·B그룹: 한 장소에서 치료받고, 새로운 두 장소에서 공포증 후속 검사
·C그룹: 세 장소에서 치료받고, 새로운 두 장소에서 공포증 후속 검사

한 장소에서만 치료받은 A그룹은 치료받은 같은 장소에서 거미 공포증 수준을 검사했다. 역시 한 장소에서만 치료받았던 B그룹은 이번에는 낯선 장소 두 곳에서 거미 공포증 검사를 받았다. 장소 세 곳을 바꿔가며 치료받은 C 그룹도 낯선 장소 두 곳에서 후속 검사를 했다.

검사 결과 치료 효과가 가장 잘 유지된 그룹은 C그룹이었다. 애초부터 치료를 다양한 환경에서 진행했기에 추후 다른 상황에서 거미를 보더라도 예전보단 훨씬 덜 무서워했다. 반면, 가장 치료 효과가 낮게 나타난 그룹은 B그룹이었다. 치료실 외의 새로운 장소에서 다시 거미를 보자, 공포감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A그룹은 치료 효과가 잘 유지되긴 했지만, 만약 B그룹처럼 장소를 바꿔 후속 검사를 했다면, 그 효과가 줄어들었을 것이다.

연구진은 “다양한 맥락에서 거미를 접한 사람들은 거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데다, 다루는 법도 알게 됐다”며 “치료 장소를 다양화했더니, 공포를 이겨내는 경험이 새로운 환경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일반화가 이뤄진 것”이라고 했다.

극복하기 쉬운 것부터 장애물을 하나씩 제거하다 보면 공포증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다. 게티이미지


즉, 두려운 대상과 상황에 단계적으로 조금씩 수위를 높여 노출하되, 장소를 다양하게 해야 효과가 오래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혼자 시도해 봐도 좋겠지만, 두려움이 심해 도움이 필요하다면 행동치료 전문가와 함께하는 것을 추천한다.

이 외에도 특정공포증이 없는 다른 사람이 공포 대상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것을 보면서 공포증을 치료하는 방법도 있다. 다른 사람이 대상을 다루는 법을 관찰 학습해 공포증을 완화하는 방법이다. 또 공포 반응으로 인해 각성된 교감신경계의 활성화 정도를 낮추기 위한 심호흡 등 이완훈련도 치료 방법의 하나로 사용되기도 한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