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의 사법제도 분석 죄책감 없이 유대인 차별하고 합법성 탈 쓴 채 민주주의 파괴 ◇히틀러의 법률가들/헤린더 파우어-스투더 지음·박경선 옮김/2만3000원·408쪽·진실의힘
1933년 나치 독일에서 제정된 ‘직업공무원제의 재건을 위한 법’ 제3조 제1항이다. 나치 독일이 순수 독일혈통으로 인정한 아리아인을 빼곤 독일에선 공무원으로 일할 수 없다고 법 조항에 단단히 명시한 것이다.
당시 나치는 인종주의를 내세웠다. 특히 구속력이 있는 법으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강화하려 했다. 여기에 발 벗고 나선 것이 법률가들이다. 법률가들은 인종은 민족의 자연적 토대라는 철학적 토대를 만들었다. 여기에 법은 민족국가에 대한 질서이므로 인종과 법이 연결되는 건 당연하다는 주장도 덧붙였다. 인종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건 문제가 없다는 논리가 만들어졌다.
오스트리아 빈대학의 윤리학·정치철학 교수인 저자가 나치 독일의 법을 분석한 사회과학서다. 나치의 법률가들이 아돌프 히틀러(1889∼1945)를 위해 법을 뜯어고친 과정을 들여다본 것. 저자는 “나치 법률가들은 민주주의 규범의 전복과 제도 파괴에 팔 걷고 나섰다”고 지적한다.
주목할 건 나치 독일의 사법제도가 ‘합법성’의 외피를 두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히틀러에게 절대권력을 부여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 나치 독일의 ‘수권법’은 바이마르공화국 헌법 제48조에 기반했다. 극우와 극좌가 난무하던 당시 바이마르공화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대통령에게 거대한 권력을 부여한 제48조가 이후 히틀러가 집권한 뒤 독재를 펼치는 데 토대가 된 것. 나치 법률가들은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여러 차례 있었던 대통령의 긴급명령과 히틀러의 독재엔 법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는 논리도 펼쳤다.
사실 학술서에 가까운 책이라 쉽게 읽히진 않는다. 하지만 꼼꼼한 분석을 통해 법이 정치에 굴복하면 국가가 어떻게 파탄 나는지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책을 읽고 나면 “법대로 해”라고 외치는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