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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김윤종]영화 속 ‘무도실무관’은 현실에 없다

입력 | 2024-11-15 23:18:00

김윤종 사회부장


경기 안산시의 한 동네는 요즘 풍경이 바뀌었다. 초저녁만 돼도 죽은 듯이 조용하다. 아이를 직접 등하교시키는 학부모들이 부쩍 늘었다. 가방에 호신용품을 잘 넣었는지 점검하는 여성도 보인다. 8세 아동을 성폭행한 조두순이 지난달 25일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벌어진 일이다. 주민 신모 씨는 하소연한다. “불안해 죽겠는데, 이사도 못 갑니다. 집을 팔아야 하는데 아무도 여기로 안 오려고 하니까….” 조두순 집에서 불과 200∼400m 내 어린이집과 초등학교가 여럿 있다. 주민 불안이 커지자 경찰은 조두순 집 앞에 경찰관을 배치했다. 안산시는 창문만 열면 조두순 집이 보이는 곳에 월세방까지 얻었다.

고위험 성범죄자 이사 때마다 혼란

안산뿐만이 아니다. 여성 10명을 성폭행한 박병화가 5월 경기 수원시 팔달구로 이사하면서 일대가 혼란에 빠졌다. 미성년자 12명을 성폭행한 김근식의 경우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안산 주민들을 인터뷰하며 9월 개봉한 영화 ‘무도실무관’이 생각났다. 전자발찌 착용자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법무부 무도실무관인 주인공(배우 김우빈)이 성범죄자들로부터 지역민을 보호하는 내용이다. 한 안산 주민은 이 영화를 언급하며 “제시카법은 진척이 없냐. 정치권은 뭐 하냐”고 성토했다. 아동 성폭행범을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응징하는 영화 주인공처럼 시민들의 불안감을 없애줄 특단책으로 ‘제시카법’을 거론한 것이다.

제시카법은 성범죄자가 학교나 공원 주변 300∼600m 내에 거주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성폭행 전과자가 거주지 인근 9세 소녀 제시카를 납치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2005년 도입됐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10월 법무부가 관련 법안을 입법 예고했다. 고위험 성범죄자가 출소하면 국가 지정 시설에 살게 하는 게 주요 골자다. 그러나 법안은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고 21대 국회 임기가 끝나며 폐기됐다. 22대 국회에서 최근 법안이 다시 발의되면서 ‘빨리 도입해야 한다’는 요구가 생긴 것. 주민들의 바람과 달리 법안이 통과되긴 쉽지 않아 보인다. 형벌을 받고 출소한 사람의 시설 거주는 이중 처벌이자, 헌법상 거주 이전의 자유 침해라는 반대가 만만치 않다. 시설이 들어설 지역의 거센 반발도 예상된다.

현행 제도부터 점검·보완이 급선무

하지만 조두순 인근 주민 입장에서는 다수의 안전이 범죄자 인권이나 자유보다 더 절박할 수밖에 없다. 전자발찌 착용자는 매년 4000명이 넘는다. 이들 중 다시 성범죄를 일으킨 경우는 최근 5년간 157건이나 발생했다. 온라인 채팅을 통해 거주지로 미성년자를 유인한 후 전자발찌를 찬 채 성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대책이 시급하다. 다만 제시카법이 영화 주인공처럼 단박에 문제를 해결해 주는 건 아니다. 미국 교정당국 조사 결과 제시카법 시행 후 노숙 성범죄자 수가 3년간 24배 증가했다. 거주 제한으로 가족과 떨어지고 직장도 갖지 못하면 ‘사회에서 배제됐다’는 분노가 커지고 재범으로 이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새 제도부터 도입해 한 번에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현행 제도부터 점검하는 게 급선무다. 2019년 도입된 1 대 1 전담 보호관찰제를 보다 활성화하면 고위험 성범죄자 점검을 강화할 수 있다. 현재는 보호관찰관 1명이 수십 명의 성범죄자를 맡는다. 성도착 환자 등에게 약물로 충동을 줄이는 치료도 제대로 시행해야 한다. 관련 제도가 2011년 시작됐지만, 치료명령이 내려진 경우는 연평균 10건 미만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영화 ‘무도실무관’을 본 후 “전자발찌 범죄자를 감시하며 시민 보호를 위해 어떻게 희생하는지 보여준다. 이 영화를 많이 봤으면 좋겠다”며 추천했다고 한다. 현실 속엔 영화처럼 ‘무쌍영웅’은 없다. 정부가 하루빨리 기존 정책이나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는지부터 확인하고 보완하는 것이 성범죄자 옆집에 살며 마음 졸이는 시민을 위하는 현실적인 해결책이다. 



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