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우선 뉴욕 특파원
“그나저나 비자 받고 들어와서 취재하는 것 맞죠?”
지난달 미국 대선 경합주 취재를 위해 노스캐롤라이나주를 찾았을 때 일이다. 사전투표소에서 불법 이민 문제와 관련해 자신이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를 한참 설명하던 백인 남성이 뜬금없이 이렇게 물었다. 농담이라기엔 무례하고 장난이라기엔 의도가 담긴 질문이었다.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하자 “물론 B비자(관광·사업 목적) 받았겠죠” 하며 멋쩍게 웃었다. 언론인 비자는 B비자가 아닌 I비자(취재 목적)다. 하지만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 사람에겐 B냐 I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미 대선 결정한 ‘평범한 백인 약자의 분노’
이들은 바른말만 하는 민주당을 미워했다. 이런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분명 사전 취재에서 ‘보라색(중립 성향인)’, ‘지지율 박빙’으로 분류된 지역이었는데도 막상 인터뷰를 해보면 10명 중 7, 8명이 트럼프 후보를 지지했다. 심지어 그들은 전혀 ‘샤이’하지 않았다. 이들은 매우 명백하고, 노골적이었으며, 당당했다. 너무 화가 나서 설명하려면 1박 2일이 필요하다는 중년 백인 여성도 있었다. 이런 ‘가난한 백인의 분노’를 민주당이 아닌, 부자 중의 부자인 트럼프 후보가 공감하고 공략했다는 게 아이러니할 뿐이었다.
‘마음껏 미워할 자유’가 두렵다
그리고 현장에서 받은 느낌 그대로 대선 결과가 나왔다. 뉴욕에서 10년 넘게 산 한 교민은 앞으로가 두렵다고 했다. 트럼프 1기를 경험한 그는 “내가 아는 미국은 트럼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며 “트럼프 1기가 미국 사회에 남긴 가장 나쁜 유산은 누군가를 대놓고 미워하고 차별해도 괜찮다는 문화를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8년 전,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사람이 사는, 진보적 도시인 뉴욕조차 그렇게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다고 했다. 2기가 어떨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트럼프 당선인이 대통령에 취임하려면 아직 두 달이 남았지만 변화는 이미 감지되고 있다. 미 언론들은 “최근 성소수자나 히스패닉계에게 ‘추방 대상자에 포함됐다’, ‘재교육 시설 입소 대상’ 등의 메시지가 뿌려져 연방수사국(FBI)이 수사 중”이라고 전했다. 이런 메시지는 휴대전화 문자와 이메일을 가리지 않고 미성년자에게까지 보내진 것으로 확인됐다. 언론들은 ‘선거 내내 대통령 당선인부터가 그렇게 행동했는데 누굴 탓하겠냐’는 식의 자조적 논평을 내놓고 있다.
임우선 뉴욕 특파원 ims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