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 부국장
2019년 6월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 암웨이센터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재선 도전 출정식을 취재했을 때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연단에 서기 전 흥미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트럼프의 ‘영적 조언자’로 알려진 여성 전도사 폴라 화이트였다. 그는 무대에 올라 “트럼프 대통령을 반대하는 모든 ‘악마의 네트워크’가 무너지게 하라”며 “트럼프 대통령은 지옥과 적의 전략을 이겨내고 운명과 소명을 다할 것”이라고 큰소리로 기도했다. 상대를 악마화하고 적대시하는 기도에 환호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며 내 편과 네 편으로 갈라진 미국의 ‘부족주의 정치’ 현실을 실감했다.
친구와 적으로 구분하는 ‘트럼프 월드’
재선을 노렸던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확산 충격으로 2020년 대선에서 낙선했지만 세상을 적과 친구로 나누는 ‘트럼프 월드’의 이분법적 세계관과 미국 우선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미 유권자들은 올 11월 제47대 미 대통령 선거에서 표를 몰아주며 그를 다시 선택했다. 트럼프를 겪을 만큼 겪고 내린 두 번째 선택이니 진짜 민심을 반영한다고 봐야 한다. 미국인의 지지와 1기 학습효과가 생긴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2주도 안 돼 2기 행정부 주요 인선을 거의 마무리할 정도로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에서 “트럼프 1기 때는 행동이 정치적 수사와 달랐지만 이번에는 제약받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트럼프 포비아’ 현실화, 우리 하기에 달려
문제는 한국이다. 2016년 트럼프 등장에 놀라고, 8년 뒤 재집권에 다시 당황하고 있다. 미국에 가장 많이 투자하고 가장 많은 일자리를 만드는 나라지만 대중·대미 수출 의존도가 높고 산업도 무역전쟁의 직격탄을 받는 반도체 자동차 이차전지 등에 편중돼 있기 때문이다. 위기라고 호들갑을 떨다가 막상 위험이 코앞까지 닥치면 어쩔 줄 모르고 당하는 ‘회색 코뿔소’ 리스크를 없애려면 한 번 더 고민하고 한 발 더 빨리 행동해야 한다. 예를 들어 EU의 구상처럼 미국산 LNG 수입을 늘리거나 미국산 원유 도입으로 대미 무역흑자를 줄일 수 있겠으나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첫 방미 때 이미 꺼냈던 카드이며 그냥 될 일도 아니다. 중동보다 먼 미국에서 LNG나 원유를 들여오려면 운송비 비축비 등의 추가 지원이 필요할 수 있다.
트럼프 당선인이 환경청장으로 지명한 리 젤딘 전 하원의원은 “트럼프는 ‘친구는 친구처럼, 적은 적처럼 대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했다. 1983년 완공된 뉴욕 트럼프타워 건설 책임자였으며 트럼프 당선인과 18년간 일했던 바버라 레스는 2017년 제작된 넷플릭스의 4부작 다큐멘터리 ‘트럼프: 미국인의 꿈’에 출연해 “트럼프는 자신을 공격한 사람을 공격한다. 더 세게 반격한다. 약한 사람도 공격한다. 약점을 알고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미국에 이익에 도전하는 포식자나 약점이 잡힌 약자로 인식되면 트럼프의 공격을 피하기 어렵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전 나토 사무총장의 말을 빌리면 트럼프 공포의 실현 여부는 우리 하기에 더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