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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결혼식[소소칼럼]

입력 | 2024-11-19 11:00:00


고등학교 동아리에서 처음 만난 L은 여자 아이돌을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장원영의 비율과 곡선을 쏙 빼닮았었다. 심지어 음악을 좋아하고 춤도 꽤 잘 춰서 MT를 가면 늘 원더걸스나 소녀시대의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드는 L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어찌나 마음씨가 곱고 세심했던지 고민 상담을 하면 2시간이 뚝딱이었다. 스타가 되기에 딱이었건만, L이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보기엔 딱 두 가지다. 아이돌을 하기엔 코가 좀 컸다는 점, 그리고 남자라는 점 때문이다. 

당시 또래 남자애들이 L에게 그다지 친절하지 못했던 것으로 안다. 흰 피부에 마르고 취향이 확고했던, 남들이 자길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던 L에 대해, 여자애들은 다른 남자애들에겐 느껴지지 않는 무해함을 감지했지만, 해로움으로 L의 다정함을 훼손하려는 애들이 있었다. 우리가 한쪽에서 아무리 L을 아껴도 상쇄될 수 없는 상처들이었다. 

그들은 아마 L을 유약하다 여겼겠지만 L의 다정함은 끝끝내 보존됐다. 대학에 들어가선 원하던 광고 공부를 하더니 손 글씨를 다듬어 아끼는 사람들에게 귀한 문장들을 선물하곤 했다. 누군가를 만나고부터는 타인을 향한 신실함을 배워 갔다. 회사에 다니기 시작하고선 그 깡말랐던 L도 음주량이 늘며 제법 그럴듯한 체격이 됐다. 1년에 서너번 씩 만나는 L이 자꾸만 멋져질 때마다 우리 여자애들은 속삭였다. “그때 동아리 선생님이 L 같은 애가 진짜 괜찮은 남자라고 했었는데” “그러게. 좀 새겨들을걸.”

그랬던 L이 지난주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런저런 기구하다면 기구한 사연 끝에 열린 작은 결혼식이었다. 내 자리가 정해져 있는 결혼식에는 처음 가 봤다. L에게 “같은 테이블을 훈훈한 싱글남으로 가득 채워달라”는 은밀한 사주를 넣고 참석했던 자리였다. 

L은 헐거운 정장에 어색한 가르마를 타고 우리를 반겨 줬다. 곁에선 머리에 베일 대신 리본을 올린 신부가 함께 사진 찍자며 손짓했다. 신부는 L과의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며 긴 출장을 다녀온 자신의 휴식을 위해 몰래 그녀의 집을 청소해 두는 사람이라고, 감자를 좋아하는 그녀에게 어떤 식당에 가도 감자는 모조리 양보한다고 했다. 수많은 성혼 선언을 들었지만 그날은 진정으로 어떤 결혼의 증인이 된 기분이었다. L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으리라는 것을 하객들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 시즌이 돌아올 때마다 나는 어떤 결혼식을 하게 될지 늘 궁금했다. 난 딱히 로망이 없었다. 식장은 형편 맞춰 잡으면 그만이고, 성대하길 바란 적도, “친구들만 모아서 진짜 결혼식을 할래요” 같은 마음도 없었다. 내 결혼에 부모의 지인을 충분히 초대하는 게 진정 효도가 된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규모를 줄여서 살림에 보태길 바라신다면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이 결혼을 겪고 나니 조금 달라지고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형식이야 어떻든 중요한 것은 깊은 축복의 나눔인 것 같다. 하객들로부터 그걸 끌어내는 지혜가 L에게는 있었다. L의 긴장한 표정과, 그래서 더 투명하게 내비치는 신부를 향한 애틋함은 우리를 한없이 동요하게 했다. 이들의 사랑을 축하해주러 온 하객들이 오히려 사랑을 한 줌씩 얻어가는 기분이었다.

하객들에게는 또 어떤가. 남들은 돈 때문에 결혼을 못 한다는데, 이 커플은 부담 속에서 ‘스드메’를 포기하고 하객들에게 극진한 음식을 대접했다. 모두가 익히 아는 L의 오래된 다정함이 식장 곳곳을 떠다니고 있었다. 

유독 외진 곳에 있던 우리 테이블은 코스 요리에 곁들여 나오는 와인을 무람없이 마셔댔다. 나중엔 다른 테이블에서 먹다 남기고 간 와인까지 주워 와 탈탈 털어 마셨다. 이따금 들른 L이나 신부의 얼굴에 아연한 표정이 스쳤지만, 테이블에는 그 커플에게 앞으로 사는 내내 와인보다 더한 것을 갚아줄 자신이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누구 하나가 “축의를 두둑이 했으니 좀 마셔도 된다”고 하자 또 다른 한 명은 “난 양쪽에 했다”며 뿌듯해했다. 그들 각자가 처음 L을 만났을 때처럼, 우리도 말없이 스쳐 지나가려면 그럴 수도 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러기에 미안할 정도로 그곳은 안온했다. 이 온기는 아마도 꽤 오래갈 것 같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