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4일(현지 시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유세 도중 약 40분간 춤을 췄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 필라델피아=AP 뉴시스
정양환 국제부 차장
처음엔 조롱의 대상이었다. 지난달 14일(현지 시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타운홀 행사. 유세 중이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은 갑자기 음악을 틀어달라더니 무려 40분 동안 말도 없이 춤을 췄다. 실은 춤이라 부르긴 민망한, 둠칫둠칫 어깨를 들썩이는 수준. 경쟁자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조차 X에 “(정신) 건강이 괜찮길 바란다”고 했을 정도였다.
미 음악계에서 이게 댄스인지, 꿈틀거림(wriggling)인지 갑론을박이 오갈 정도로 놀림거리였던 몸짓. 하지만 세상은 모를 일이다. 대선 뒤 트럼프 댄스는 삽시간에 승리의 세리머니로 둔갑했다. 특히 여러 스포츠 선수들이 따라 하며 소셜미디어에 숱한 밈(meme)이 쏟아지고 있다.
이달 10일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열린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 경기에서 ‘트럼프 댄스’를 추는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의 닉 보사 선수. 탬파=AP 뉴시스
던져진 불씨는 온 들판에 퍼져갔다. 종합격투기(UFC) 헤비급 챔피언 존 존스는 16일 뉴욕 경기 승리 뒤 트럼프 댄스를 춰 현장에서 지켜보던 트럼프 당선인을 흐뭇하게 했다. 이후 NFL의 저데리어스 스미스와 브록 바워스, 캘빈 리들리도 동참했다. 심지어 미국이 자랑하는 축구스타 크리스천 풀리식(AC밀란)까지 18일 국가대표전에서 따라 했다. 보사와 존스 외엔 모두 “정치적 의도 없이 재미 삼아 췄다”고 해명했지만, 이미 불길은 활활 타올랐다.
친(親)트럼프 매체 폭스뉴스는 신이 났다. 진행자 제시카 탈로브는 “스포츠 스타들의 솔직한 의견 표명은 환상적”이라며 “트럼프 당선인과 스포츠계의 재결합(reunion)이 시작됐다”고 반가워했다.
사실 트럼프 당선인은 소문난 스포츠 애호가다. 골프광이자 뉴욕 양키스의 열혈 팬이고, 복싱 사이클 레슬링 등 여러 종목을 후원해왔다. 데이나 화이트 UFC 대표가 강성 트럼프 지지자가 된 건 UFC가 초창기 스포츠계에서 따돌림당할 때 트럼프 당선인이 적극 도와줬던 게 결정적 계기였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인은 첫 재임 동안 스포츠계와 원만하지 않았다.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언동과 정책으로 많은 스타들이 등을 돌렸다. 미국프로농구(NBA)의 르브론 제임스와 스테픈 커리는 대표적 트럼프 혐오주의자들. 미 프로 스포츠는 우승하면 이듬해 백악관 방문이 관례이나, 상당수 NBA와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응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절대 참지 않는’ 트럼프 당선인은 폭언을 퍼부었다.
역시나 세상 일은 알 수 없다. 어쩌면 우린 오타니 쇼헤이와 트럼프 당선인의 어깨동무를 볼 수도 있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게 있다. 마음의 응어리는 오래간다. 특히 트럼프 당선인은 그걸 쉽게 잊을 사람이 아니다. 함께 춤을 춰도 언제 발을 밟을지 모른다. 그게 스포츠건 아니건.
정양환 국제부 차장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