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관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5일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자 당 안팎은 거의 폭탄 맞은 분위기다. “정치 판결” “미친 정권의 미친 판결” “사법 살인” 소리가 터져 나온다. 심지어 공직선거법에서 ‘허위사실공표죄’를 삭제하는 법안까지 발의했다. 이재명을 위한 아부성 법안 상납이다.
묻고 싶다. 민주당은 입때껏 이재명의 ‘사법 리스크’를 몰랐단 말인가? 당 대표 비서실장 이해식 의원이 이재명의 빗속 연설 사진과 함께 올린 “신의 사제, 신의 종”이라는 글처럼 신성(神性) 가득한 무균 무때 정치인인 줄 알았던가?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김건희 윤석열 국정농단 규탄·특검 촉구 제3차 국민행동의 날‘ 집회에서 연설하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뒷모습. 뉴시스
2021년 8월 말 ‘이재명 후보님, (주)화천대유 자산관리는 누구 것입니까’란 칼럼이 경기경제신문에 실린 이후, 아니 실은 그 전부터, 이재명 주변엔 꺼림칙한 법적 도덕적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시한폭탄처럼 언제 터지느냐가 문제일 뿐. 그래서 이재명은 대선에서 패하기 무섭게 금배지에 당 대표직까지 겹겹이 방탄복을 껴입고는 민주당을 볼모로 장악했던 거다. 패장은 잠시 정계를 떠나는 기존 정치문법까지 무시한 채.
민주당은 이번 판결이 윤 정권의 ‘대선 후보 죽이기’라고 주장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대선 후보 치고 이재명 같은 전례가 없다. 범죄 혐의 그득한 사람을 민주당이 대선 후보로 뽑았을 뿐이다. 심지어 대선 경선 내내 이낙연 캠프 측은 “대장동 문제가 정권 재창출의 위기, 민주당의 위기가 돼선 안 된다”고 이재명의 사법 리스크를 누누히 경고했다. 귀담아 듣지 않았던 민주당, 특히 이재명 지지자들은 제 발등 찍어야 마땅하다.
2002년 대선 때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숱한 네거티브를 겪은 사례는 있다. 아들이 병역을 회피했다는 병풍(兵風) 의혹은 거의 치명상이었다. 병풍을 터뜨린 김대업은 2004년 대법원 유죄 판결을 받았다. 대선 후보로서 이회창이 ‘내 삶에서 가장 치욕스럽고 뼈아픈 회한을 남긴’ 일이라던 차떼기 불법 대선자금 사건은 2003년 10월 터졌다.
2003년 12월 16일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가 대선자금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대검찰청에 자진 출두하는 모습. 동아일보DB.
● 민주당 대선 후보는 바뀔 수도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선 이낙연 후보가 2021년 10월 10일 서울 합동연설회 및 3차 슈퍼위크에서 정견 발표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패자의 흔쾌한 승복 없이 이재명을 대선 후보로 뽑은 지 열흘도 안 돼 대장동 의혹 핵심 인물 중 하나인 남욱이 미국서 돌아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한국에 며칠만 일찍 들어왔으면 (이재명) 후보가 바뀌었을 수도 있겠네요.” 귀국 바로 다음날 이재명 최측근 김용이 체포돼 사흘 만에 구속된 것이다. 대장동 일당으로부터의 자금 수수 자체를 부인했던 김용은 결국 그들에게 경선 무렵 선거자금을 받은 혐의로 작년 11월 1심 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돈을 건넨 남욱은 징역 8개월이다. 그 ‘윗선 의혹’이 있는 이재명에 대해선? 마냥 늘어지게 재판중이다.
대장동 의혹 핵심 인물인 남욱 변호사가 2021년 10월 18일 인천국제공항에서 긴급체포돼 검찰 관계자들과 입국장을 나서는 모습. 동아일보DB.
● 민주당은 단체로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렸나
이재명은 한술 더 떴다. 대선에 패한 뒤 청년정치인 박지현을 앞세워 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부터 장악했다. 새미래민주당 전병헌 대표의 한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민주당은 아직 친문(친문재인)이 주류였다. 친문은 이낙연을 서울시장 후보로 내보내 당을 수습하려 했다. 그런데 대선 패배 책임을 진다며 대표직을 사퇴했던 송영길이 돌연 서울시장에 출마하겠다고 인천 계양 의원직을 던진다. 그 자리에 이재명이 나섰다. 지역구 유세 중 이재명이 제 손으로 제 목 치는 시늉까지 해가며 “이번에 이재명 지면 정치생명 끝장난다. 진짜요. 끽” 하는 영상을 보면, 의원 불체포특권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실감이 난다.
2022년 국회의원 보궐선거 당시 인천 계양을에 출마한 이재명 후보가 유세 중 “이번에 지면 이재명 정치생명 끝장난다”며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는 모습.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 가난하게 자랐다고 다 이재명 같진 않다
이재명에게 강점이 많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가난 속에 태어나 열세 살에 공장노동자가 됐고 장애도 입었으나 검정고시로 대학에 갔다. 고시 합격 후 호의호식 마다하고 노동변호사로, 시민운동으로, 마침내 어려운 사람을 위해 정치하겠다고 나선 서사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감동을 뛰어넘는다. 이재명이 대선 후보일 때 유시민은 ‘머리 좋고 학습 능력이 뛰어나 목표를 정하면 자기 자신을 계속 바꿔나가는 사람’이라고 MBC에 나와 평했다. 비슷한 의미로 진중권은 이재명을 ‘극단적으로 발달한 기회 이성의 소유자’라고 페이스북에 적었다. 어떤 상황에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그래서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드는 강한 추진력이 장점인데 누구처럼 자신만 알고 공사(公私)구분을 못한다는 게 나는 무섭다.
1960년대 가난하게 자란 사람이 어디 이재명 뿐이랴. 그는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에서 청소부였던 아버지가 썩은 과일을 주워와 가족들에게 먹이곤 했다고 썼다. 나이 들어 내 돈으로 신선한 과일을 사 먹게 되니 어찌나 후련했는지 모른다고도 했다. 그런 사람이 경기도지사 시절 도 예산으로 과일을 2791만원어치나 먹었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조명현 전 경기도청 공무원이 쓴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법카’
쪼잔한 기소라고? ‘공적 지위를 남용한 사적 이익 추구’가 바로 부패다. 저서에선 성남시 ‘청년 배당’ 덕에 3년 만에 처음 과일을 사먹었다는 학생을 눈물겹게 소개하면서 뒤로는 태연히 자기 잇속 차리는 이재명의 다면성이 섬뜩한 거다.
● 이재명과 민주당을 분리하라
민주연구원은 최근 발간한 연구보고서 ‘민주당의 역사와 정치철학’에서 “민주당은 K시대를 선도하는 대한민국 대표정당”이라고 했다. 2024년 8월 ‘다시 뛰는 대한민국’을 약속한 이재명 대표의 연임으로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당원 중심 정당, 함께 잘 사는 미래를 만드는 준비된 정당”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재명 한 사람을 결사 옹위하는 정당은 민주정당이랄 수 없다. 다수의 폭정(tyranny of the majority)일 뿐이다.
이재명이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진작 대표직을 내려놓고 재판 받아야 했다. 진정 자신 있고 당당하다면 애초 금배지를 달겠다고 나서지도 않았을 터다. 안타깝게도 이재명에게 공선사후(公先私後)는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 국민의 복이 거기까지인지 슬프지만 만일 그에게 공적 책무감이 남아 있다면, 이제라도 다수당 대표로서 정부 도울 일은 돕겠다고 나서주면 좋겠다. 이재명을 보는 눈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못한다면, 민주당은 이재명과 갈라설 길을 찾아야 한다. 70년 역사의 민주당이,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을 역사적으로 구현해온 정통정당’이라는 민주당이, 숱한 범죄 혐의를 안고 있는 이재명에 인질로 사로잡힌 모습을 더는 봐줄 수 없다. 이재명만 아니라면 민주당을 지지하겠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윤석열 정부가 너무 못해서, 그동안 바친 순정이 아까워서, 이재명을 버릴 수 없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생물이고 억지로 되는 일은 없다. 국고보조금을 받는 민주당은 극성 당원들만의 정당일 수 없다. 백범이 원했던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원한다면, 민주당은 이제 이재명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어야 한다.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