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순창 미식여행
최근 방영된 넷플릭스 ‘흑백요리사’에서는 미슐랭 스타 셰프들이 한국의 전통장(고추장, 된장, 간장)를 주제로 기발한 음식을 선보였다. 세계인들도 우리나라 음식 맛의 정수인 장(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12월에는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최종 등재는 12월2~7일 파라과이에서 열리는 제19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결정된다. 담양과 순창의 장담그기 명인들을 찾아 ‘K미식 장벨트 기차여행’을 떠났다.
전남 담양군 창평면 장흥 고씨 양진재 종가의 항아리 풍경.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전남 담양군 창평면에 있는 대숲을 지나 솔숲으로 둘러싸인 마당에 들어서니 장엄한 광경이 펼쳐졌다. 1200여 개의 항아리가 사열을 하듯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와집 툇마루엔 늙은 호박이 놓여 있고, 빨간 고추가 장독대에 어우러져 가을을 느끼게 했다.
“집안에서 10대 째 지켜온 씨간장입니다. 370년이 넘은 씨간장이예요.“
기순도 명인이 10대 째 370년간 지켜온 중부의 씨간장.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항아리 구경을 마친 후에 체험장에서 기 명인으로부터 장담그기와 장가르기를 배웠다. 이 집에서는 특이하게 메주에 ‘죽염수’를 붓고 대나무를 태워 만든 숯과 고추, 대추를 넣어서 담근다.
“보통은 메주에 소금을 넣어서 만들거든요. 그런데 저희는 더 깊은 맛을 내기 위해 죽염수를 넣어줍니다.”
명인이 만드는 장맛의 토대는 바로 죽염(竹鹽)이었다. 담양의 3년 이상 자란 왕대를 잘라 간수를 뺀 천일염을 넣고 소나무 장작불에서 구워내 만드는 것이 죽염이다. 죽염에 지하 150m에서 퍼올린 암반수를 섞은 죽염수로 담근 간장과 된장은 짜지 않고 감칠맛이 난다. 숯은 정화작용을 하고, 고추는 곰팡이를 방지하고, 대추는 달짝지근한 맛을 내는 역할을 한다.
“메주는 국산 콩을 동짓달에 끓여서, 섣달에 발효를 시켜서 만듭니다. 정월은 장을 담가야 가장 맛있어요. 매년 장을 담글 때는 지금도 좋은 날을 받아서 목욕재개하고, 기도하고 시작합니다. 부디 장맛이 변하지 않도록,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것이죠.”
장을 담그고 상온에서 2~3개월 숙성한 뒤에는 ‘장 가르기’를 할 때가 온다. 이번에는 장 가르기를 체험할 시간. 병 속에서 잘 발표돼 까만색으로 변한 죽염수를 따라내는 것이다. 이 간장을 그대로 사용하면 ‘청장’(1년 이내 숙성)이고, 달여서 색깔과 향을 더 깊게 만들어주면 ‘중간장’(1~3년 숙성), 항아리에서 5년 이상 숙성시켜 만드는 것이 ‘진장’이다.
장가르기 체험하는 외국인.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장을 갈라서 담아줘야 메주는 된장이 되고, 까만 액체는 간장이 되지요.”
아, 그렇구나! 메주로 된장을 만드는 것은 알았지만, 하나의 메주에서 동시에 간장도 나오고 된장도 만들어진다는 것을 처음 알게된 것이다.
“간장과 된장이 함께 나오는 건 우리 문화의 특징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은 된장은 된장대로, 간장은 간장대로 따로 만듭니다. 왜냐하면 메주가 없이 콩으로 발효를 시키기 때문에 한가지 밖에 만들 수가 없지요.“ (기순도 명인)
간장을 따라낸 후에는 병 속에 남은 메주를 잘 긁어낸다. 비닐장갑을 낀 손과 나무 수저로 메주를 잘게 부수면 된장이 된다. 된장을 담은 병(450g)과 간장을 담은 병(300ml)에 이름과 날짜를 써서 라벨을 붙인다. 체험 참가자들은 이 병을 집으로 가져가서 2~3개월간 상온에서 숙성 후 맛있는 장이 된다고 한다. 체험이 끝난 후에는 된장, 간장으로 만든 음식을 맛볼 차례다. 된장으로 맑은 된장국을 끓이고, 명인이 직접 담은 ‘간장 김치’를 맛본다. 전라도식 김치에는 젓갈이 많이 들어가는데, 간장과 고춧가루로만 담은 김치는 깔끔하면서도 깊은 맛이 난다.
담양 삼다리 대나무밭.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삼다리 내다마을에 있는 찻집 명가혜에서 차 꽃을 띄운 차를 만났다. 매화꽃이나 국화꽃, 연꽃을 띄워서 향기와 함께 마시는 차는 마셔봤지만, 차꽃을 띄워서 마시는 차는 담양에서 처음 마신다. 담양에서는 대나무 숲 속에서 차나무가 자생한다. 대나무의 잎에서 떨어지는 댓잎 이슬을 먹고 자란다고 해서 ‘죽로차(竹露茶)’로 불린다. 이 곳에서는 죽순껍데기를 덖고 비벼서 만든 ‘죽신 황금차’도 맛볼 수 있다.
차꽃을 띄워서 마시는 죽신황금차.
담양 삼다리 죽세공품 판매점 ‘담다’ 2층에서는 버선금줄 만들기 체험도 한다. 기순도 명인의 항아리에도 흰색 버선 모양의 종이가 거꾸로 붙여져 있었다. 단지 안에 든 발효 음식에 방해되는 액귀(厄鬼)를 쫏아 낸다는 뜻의 민속이다. 버선을 거꾸로 붙이는 이유는 나쁜 병균들이 버선을 타고 올라가다가 버선코의 끝부분에서 더는 올라가지 못하고 소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순창 고추장 민속마을
전북 순창은 고추장으로 유명한 고을이다. 관광지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숨은 비경과 맛집이 많아 여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슬로시티(Slow City)’라고 불리는 듯하다.
단풍이 물든 순창 강천산 계곡.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순창 강천산 계곡에 놓여 있는 메주 모양의 다리 송음교.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순창고추장 강순옥 명인이 고추장 담을 때 사용하는 떡메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고추장 버터 만드는 재료.
옹기 항아리.
권운주 도예가의 체험장.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순창옹기체험관 가마.
담양의 기순도 명인과 순창의 강순옥 명인도 다음달 2일 파라과이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다.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기념해 농림축산식품부와 한식진흥원, 코레일관광개발은 함께 ‘K-미식 장 벨트 기차여행’ 상품을 만들었다. 담양의 고려전통식품 기순도 명인과 함께 전통 장담그기 체험, 담양 삼다리 내다마을에서 버선금줄만들기와 죽로차 체험, 순창장본가 강순옥 명인과 함께 고추장 담그기체험, 순창 무형문화재 청자기능보유 이수자 권운주 선생과 함께 하는 옹기체험을 하는 미식여행이다.
●맛집= 순창에서는 미슐랭 스타 유현수 셰프가 고추장, 간장, 된장 3가지 소스를 이용해 개발한 ‘순창 삼합’이 화제다. 삼합이란 원래 삼겹살 수육과 홍어를 묵은김치에 싸먹는 음식. ‘순창삼합’은 고추장으로 매콤달콤하게 맛을 낸 ‘섬진강 고추장 장어튀김’, 숙성된 간장으로 절인 ‘순창 씨간장김치’, 구수한 청국장 소스를 얹은 ‘순창 청국장 수육’으로 구성됐다. 내륙지방이라 홍어대신 섬진강 장어를 내세운 게 흥미롭다. 그런데 오히려 주인공은 재료 위에 듬뿍 발라져 있는 전통소스 3총사다. 느끼한 장어 튀김을 순창고추장이 매콤달콤하게 잡아주고, 수육 위에 올라가 있는 청국장 소스는 고급진 느낌이다. 수십년 묵은 명가의 씨간장으로 담은 묵은 김치로 싸먹으면 모든 음식이 마침내 조화를 이룬다.
유현수 셰프가 개발한 ‘순창삼합’.
담양의 대표음식은 떡갈비. 1963년부터 담양 전통의 ‘가리구이’를 팔아온 덕인관에서 떡갈비를 맛보았다. 가리구이는 갈비구이의 순우리말이라고. 덕인관의 한우떡갈비는 120년 숙성한 씨 간장을 사용하며, 12시간 이상 숙성시켜 감칠맛이 대단했다. 궁중음식이었던 떡갈비는 갈비에 붙은 살을 떼어 내 수십 차례 칼집을 넣어 다지고 양념하여 동그랗게 빚은 후 갈비뼈에 얹어 석쇠에 구운 요리. 아무리 맛이 있어도 임금이 체통을 벗어던진 채 갈비를 손에 들고 뜯을 수 없어 젓가락으로 집어 먹을 수 있게 만들게 됐다고 한다. 대마도 정벌 후 일본에 다녀오면서 외교관으로 활약했던 노송당 송희경(1376~1446) 선생이 조정을 떠나 담양에 정착해 궁중의 진미 중 하나를 전한 것이 담양 떡갈비다. 담양 떡갈비는 조선시대 어른들이 먹기 편하도록 만들었다고 하여 ‘효갈비’로도 불렸다고 한다.
담양 덕인관 떡갈비
담양·순천=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