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국가부채 디폴트를 낸 나라. 선진국에서 한순간에 ‘망한 나라’로 전락해 조롱받던 나라. 어디인지 아시겠죠. 바로 그리스입니다.
그리스 경제가 10여 년 만에 되살아났다는 얘기 들어보셨을 겁니다. 요즘 그리스는 유로 경제의 최고 모범생으로 칭찬받죠. 그럼 그리스는 어떻게 기적적으로 부활했을까요. 뼈를 깎는 긴축정책이 경제를 살린 걸까요. 흔히 그렇게 생각하지만, 진짜 그리스 경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좀 다른데요. 오늘은 그리스의 반전 경제학을 들여다보겠습니다.
그리스 경제가 십수 년 만에 살아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과연 부활은 무엇 때문일까. 사진은 그리스가 국가부도 위기 한가운데 있었던 2012년, 아테네 신타그마 헌법 광장에서 찢어진 그리스 국기를 새 국기로 교체하는 의회 직원들.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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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파티는 갑자기 끝났고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집니다. 경제를 떠받치던 관광·해운 산업은 직격탄을 맞았고, 투자자들은 부채비율 높은 그리스에서 발을 빼기 바빴죠. 거품이 빠르게 꺼졌습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충격은 EU에서 경제 체력이 가장 부실했던 그리스에 직격탄을 날렸다. 사진은 2011년 아테네에서 시위를 벌이는 그리스 국민. 동아일보DB
그렇게 경제회복 열망에 힘입어 총리직에 오른 파판드레우. 취임 몇주 만에 전 세계를 경악케 할 깜짝 자백을 합니다. 집권하고 나서 까보니, 국가 통계가 완전히 엉터리였다는 거죠. 실제론 재정적자가 기존 발표치의 몇 배라며 통계를 수정 발표해 버립니다(GDP의 3.7%→12.7%로 수정, 나중에 15.4%로 최종 정정됨).
있는 줄 알았던 돈은 없다, 외부 수혈 없인 버틸 수 없다는 게 드러난 건데요. 결국 2010년 4월 파판드레우 총리가 아름다운 카스텔로리조 항구를 배경으로 유럽연합(EU)·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다고 발표합니다. “침몰할 준비가 된 배”처럼 보이는 그리스는 “명예와 신용이 없는 나라”가 됐다면서 말이죠. 그리스 경제사의 굴욕적인 순간입니다.
2010년 4월 파판드레우 당시 그리스 총리가 EU와 IMF에 지원을 요청하는 발표를 하고 있다. 사회주의 정당을 이끈 파판드레우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총리를 지낸 정치 명문가 출신이다. 2009년 유세 때 했던 “돈이 있다”는 발언은 지금까지도 그를 따라다닌다. 동아일보DB
먹고 살기 어려워진 국민은 가혹한 긴축안에 분노했고, 나라는 총파업과 시위로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2015년 이런 분노를 바탕으로 집권한 포퓰리즘 정당(급진좌파연합 시리자)은 EU를 상대로 벼랑 끝 전술을 펼쳤죠. 긴축을 요구하는 구제금융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부결을 이끌어냈고요. 채무 탕감 안 해주면 ‘디폴트+유로존 탈퇴’로 가버리겠다는 식으로 협박한 건데요. 하지만 이럴수록 EU 다른 국가는 더 완고해졌고, 결국 그리스는 백기를 들고 맙니다. 전보다 한층 더 혹독한 긴축 요구를 담은 추가 구제금융안을 받아들여야 했죠.
그렇다고 그리스 경제가 아직 제대로 살아난 건 전혀 아니었습니다. 비유하자면 간신히 링거 바늘 빼고 입원실에서 퇴원하는 수준이었죠. 당시 국가부채는 GDP의 180%에 달했고(EU 최대), 실업률은 20%에 육박했고, 국가 신용등급은 B+(22단계 중 14번째)의 투자부적격 등급이었으니까요.
2015년 5월 그리스의 당시 치프라스 총리와 독일 메르켈 총리의 모습. 급진좌파연합의 치프라스 총리는 벼랑 끝 전술로 부채탕감을 받아내려 했지만 협상에 실패했다. 결국 그는 180도 입장을 바꿔 훨씬 더 혹독한 긴축정책을 받아들인다. 당시 메르켈 총리는 그리스의 긴축을 압박하는 EU의 주동자로 여겨져서, 그리스인에겐 증오의 대상이 됐다. 동아일보DB
“우리(IMF)는 조정(긴축)이 성장에 비우호적이고 지속 불가능한 방식이란 우려를 점점 느꼈습니다. 지출은 잠재 성장과 기본 공공서비스 제공을 방해하는 수준으로 삭감됐습니다. 우리는 재정통합이 GDP에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했습니다. 특히 지나치게 낙관적인 가정으로 인해 노동자에 과도한 부담을 줬고, 그 결과 프로그램(구제금융안)에 대한 지지가 줄어들었습니다.”
그리스 구제금융 협상을 이끌었던 장클로드 융커 전 EU 집행위원장도 2022년 인터뷰에서 비슷한 고백을 합니다. “그리스 시민들은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이유가 많습니다. 그들은 이 끔찍한 기간 동안 많은 고통을 겪었고, 존엄성을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그리스 사회에 부과된 조치는 너무 엄격했습니다. 실수의 일부는 유럽 연합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IMF, 중앙은행, 그리고 제가 몇 년 동안 위원회에서 맹목적인 긴축 예산을 시행했기 때문이죠. 그것은 실수였습니다.”
2015년 긴축을 요구하는 EU의 구제금융안을 받아들일지에 대한 국민투표를 앞두고 유권자가 ‘아니요’라고 적힌 종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동아일보DB
이런 상황을 바로잡지 않고 긴축을 위해 세율을 대폭 높이자 어떻게 됐을까요. 가뜩이나 낮았던 세금 징수율이 뚝 떨어집니다(2010년 65%→2017년 41%). 고소득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탈세를 한 거죠. 그렇게 부자들은 이리저리 빠져나간 반면, 저소득 노동자는 실업과 최저임금 삭감으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지난 5년간 그리스가 이룬 변화는 놀랍습니다. 전 세계가 ‘그리스의 기적’이라며 찬탄하죠. 일단 지표상으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볼까요. 그동안의 성과는 이렇습니다.
EU 국가 중 실업률이 가장 빠르게 감소했습니다(18→9.3%).
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이 가장 크게 감소했습니다(207→153%).
임금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평균임금 5년간 20.2% 인상).
개인 소비 증가율이 유럽 평균보다 높습니다(23.4%).
1인당 실질 GDP가 5년간 7.7% 증가해 EU 평균(3.3%)을 크게 웃돕니다.
1999~2023년 그리스의 연간 경제성장률. 2022년 5.6%, 2023년 2.0%를 기록했고 올해는 2.2% 성장을 예상한다. EU 국가 중엔 매우 높은 수준이다. 트레이딩이코노믹스
2019년부터는 빚도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습니다. 몇 차례 조기 상환 끝에 IMF 대출금은 전액 상환했고요. 유로존 국가에서 빌린 ‘그리스 대출 기구(GLF)’ 대출금도 올해 말이면 다 갚을 거라고 합니다. 내년엔 만기가 아직 많이 남은 장기부채 중에서도 50억 유로어치를 조기 상환한다는 계획도 밝혔죠.
그리스의 GDP 대비 정부 부채비율 추이. 2008년 처음 100%를 넘어선 부채비율은 2020년 207%로 정점을 찍은 뒤 뚜렷한 하락세를 보인다. 그리스 정부가 부채를 조기상환하는 데다, GDP 성장률이 높아진 덕분이다. 올해 들어서는 부채비율이 153%로 더 낮아졌다. 트레이딩이코노믹스
①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합니다.
그리스는 2019년 이후 네 차례에 걸쳐 최저임금을 인상했습니다. 그 결과 월 650유로(약 96만원)였던 최저임금이 830유로(약 122만원)로 28% 인상됐죠. 이 기간 물가상승률(16%)을 크게 웃도는 겁니다. 구제금융 기간 긴축을 한다며 최저임금을 싹둑 삭감했던 것과 비교하면 극적인 변화인데요. 그리스 노동사회보장부 장관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생산된 부가 정의에 따라 분배돼야 하기 때문에 최저임금을 인상합니다. 선거 전 공약한 대로, 재정 안정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2027년까지 최저임금을 950유로로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11월 20일 아테네에서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민간, 공공부문 노조원들. AP 뉴시스
한번 봅시다. 보통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 논리가 뭘까요. 임금이 올라가면→고용주 부담이 늘어나니까→고용이 감소하고 실업이 늘어날 거라고 보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리스에서 실제 나타난 경제학 작동방식은 달랐습니다. 이 기간 고용은 50만명 늘어났고, 실업률은 꾸준히 감소했죠. 최저임금을 받는 저임금 계층의 살림살이는 나아졌고요. 저소득가구는 소비성향이 높기 때문에 늘어난 소득이 소비 증가로 쉽게 이어지는 법입니다. 이로 인해 소비가 살아나고 물가도 적당히 뛰면서 GDP 증가에 기여했죠. 최저임금 인상이 가져온 선순환입니다.
사실 ‘최저임금 인상이 일자리 감소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작다’는 건 데이비드 카드 미국 UC버클리대 교수가 1992년 연구에서 밝힌 바 있죠. 이 연구는 그에게 2021년 노벨경제학상까지 안겨줬는데요. 하지만 여전히 최저임금 인상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주장이 완전히 엇갈리는 뜨거운 주제입니다.
그래서 IMF도 그리스가 최저임금을 인상한다고 했을 때 많이 우려를 표했습니다. FT의 마틴 울프 칼럼니스트는 “정책의 후퇴는 위협”이라며 경고했죠. 하지만 그리스는 정부위원회에 참여한 런던정경대 연구팀 조사 결과를 신뢰했습니다. 당시 연구팀은 “최저임금의 신중한 인상은 임금 불평등 감소에 도움이 되고, 노동 수요에 미치는 영향은 무시할 정도일 것”이라고 결론 내렸죠.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실제로 그랬습니다.
지난해 선거에서 집권당이 승리한 뒤 손을 흔들고 있는 미초타키스 총리. 아버지가 총리이고 누나가 전 아테네 시장인 정치 명문가 출신이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나와 컨설팅 업체 매켄지에서 일한 시장주의자다. 경제 회복에서 좋은 성과를 인정받지만, 언론 자유를 억압하고 친인척을 요직에 기용한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다. 그리스에선 그가 2027년 임기가 끝나면 EU 고위직을 노릴 거라는 관측이 나오는 중. AP 뉴시스
그리스 경제정책의 또 다른 큰 축은 감세입니다. 위기 시절 그리스는 재정 흑자를 위해 법인세를 대폭(20→29%) 끌어올렸는데요. 미초타키스 총리는 취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법인세율을 22%까지 끌어내립니다.
그뿐 아니라 배당소득세 인하(10→5%) 등, 긴축 시절 인상됐던 50가지 세금을 이미 없애거나 내렸는데요. “점진적이면서도 재정적으로 지속 가능한 감세는 우리의 핵심 선택”이라고 미초타키스 총리는 말합니다. 기업 활동을 장려하고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린다면, 세율을 낮춰도 세수는 오히려 늘어난다는 거죠.
이렇게 세율을 대폭 낮추는 동시에 그리스 정부가 집중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탈세와의 싸움입니다. 전자송장 의무화, POS 사용 확대 같은 ‘거래의 디지털화’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죠. 마치 과거 한국이 ‘신용카드 소득공제’ 정책으로 지하경제를 줄였던 것과 비슷한 발상인데요. 실제로 이런 조치의 세수 증대 효과가 쏠쏠하다고 합니다. 만약 세금 누수를 더 단단히 틀어막을 수 있다면 지금은 24%나 되는 부가가치세까지 인하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떠신가요. 최저임금 인상과 세금 인하의 결합이라니. 진보와 보수, 양쪽 모두를 당혹스럽게 하는 정책 조합인데요. 달리 보면, 가혹한 긴축은 없었지만 재정적인 책임감을 가졌고요. 불평등을 바로잡으면서도 포퓰리즘으로 빠지진 않았습니다.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어떻게 경제를 살릴지에만 초점을 맞췄죠.
미초타키스 총리는 올 2월 이코노미스트 기고문에서 “경제에 있어서 우리는 성장에 집중했다”고 말합니다. “포퓰리즘에 맞서는 것은 공평한 경제 성장을 창출하는 것과 관련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포퓰리즘 정치가 휩쓸고 있는 전 세계에 그리스 경제 부활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By.딥다이브
그리스 경제에 대해 ‘어떻게 망했는지’는 자세히 다루면서, 정작 ‘어떻게 다시 살아나고 있는지’는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더군요. 이젠 부활의 스토리에도 집중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유로존 가입 이후 초호황기를 누렸던 그리스 경제는 금융위기 직격탄을 맞고 고꾸라졌습니다. 국가통계 조작까지 겹치며 금융시장 신뢰를 잃었고, 결국 국제 채권단의 구제금융을 받아야했죠.
-8년이나 이어진 긴축은 가혹했지만 구조개혁은 제대로 되지 않았고, 고통은 가난한 자에 집중됐습니다. 이젠 당시 맹목적인 긴축을 요구했던 게 실수였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2019년 그리스 국민은 포퓰리즘 대신 중도파를 선택했습니다. 최저임금 인상과 법인세 감면을 중심으로 한 경제정책을 펼치면서 그리스 경제는 기적적으로 살아나고 있죠. 긴축도, 퍼주기도 아닌 경제 성장에 집중한 결과입니다.
*이 기사는 2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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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