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2스푼, 설탕 1스푼 반, 프림(커피 크리머) 2스푼.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략 이 정도였다. 1970년대, 다방 탁자에는 설탕 통과 프림 통이 놓여 있었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면 원하는 만큼 설탕과 프림을 넣으면 됐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커피 세트가 귀한 선물이던 시대. 설탕과 프림을 각각 용기에 담아 내놓으면 손님이 취향대로 커피에 넣고 저어 마셨다.
어차피 커피와 설탕과 프림을 섞어 마시는 거라면 아예 처음부터 이 세 가지를 한데 섞어 놓으면 좋지 않을까. 병(甁)도 세 개가 아니라 하나만 있으면 되니 보관도 편리하지 않겠는가. 1976년 동서식품에서 국내 최초로 커피믹스를 출시할 때 생각은 이랬다. 시장에 첫선을 보인 커피믹스는 유리병 포장이었다.
● 독자 브랜드 ‘프리마’를 내놨지만…
당시에는 연유나 우유를 농축한 수입 액상 크리머를 쓰기도 했지만 보존기한이 짧고 보관하기도 불편했고, 우유 향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에 물엿과 야자유(油)를 주원료로 한 분말 크리머를 제너럴푸드 기술이 아닌 동서식품 독자 기술로 제조한 것이다. 고소한 야자유 향이 커피 쓴맛을 잡았고, 싼 데다 보관도 쉬웠다. 하지만 남대문시장 등에서 암암리에 팔리는 네슬레 ‘카네이션’ 같은 외제 커피 크리머에 밀려 힘을 쓰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야심 차게 내놓은 커피믹스였지만 약점이 있었다. 흡습(吸濕·습기를 빨아들임)이었다. 뚜껑을 열고 떠낼 때 스푼에 묻은 물기를 빨아들여 커피믹스가 떡처럼 굳거나, 커피가 설탕 속 수분을 흡수해 덩어리지는 일이 빈번했다. 또 커피와 프리마, 설탕의 배합 비율이 모든 소비자 취향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손님을 대접할 때 설탕은 몇 스푼, 프림은 몇 스푼 식으로 물어보지 않고 커피믹스만 덜렁 내놓으면 성의 없이 보인다는 거부감도 있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 아웃도어용 커피를 목표로
1982년 동아일보에 실린 커피믹스 광고.
흡습 문제를 해결하려면 유리병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일을 줄이고 오래 보관하지 말아야 했다. 1회용 개별 포장이 방법으로 떠올랐다. 여기에 더해 판매 목표를 변경했다. 유리병 커피믹스의 목표는 가정이었다. 손쉽게 커피와 설탕 프리마를 타 먹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 하지만 개별 포장의 목표는 야외 음용(飮用)이었다. 밖에서 물을 끓일 수 있는 도구가 있을 때 커피를 마시고 싶어 하는 사람이 타깃이었다.
1회용 커피믹스 포장 형태는 현재와 같은 긴 스틱형이 아니었다. 티백을 담는 사각 포장과 흡사한 가로 5cm, 세로 7cm 정도의 비닐 재질 직사각형 파우치 형태였다. 문제는 이 파우치 제작이 자동화가 아니었다는 것. 일일이 손으로 커피믹스를 넣고 밀봉해야 했다. 인두질로 밀봉하던 때도 있었다. 포장 자동화는 1980년대 들어서 이뤄졌다.
‘전국 주요 등산로에는 어김없이 1봉지 45원 하는 커피믹스를 파는 노점상이 등장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지만 판매는 저조했다. 수작업 포장에 따른 낮은 생산성을 그다지 염려하지 않아도 될 수준의 매출이었다. 그래도 접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들고 다니기 편하게 만든 커피믹스가 언젠가 팔릴 것이라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1980년대 중후반까지 커피믹스 광고는 여전히 야외에서 마시는 것에 집중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 커피믹스 가로막는 ‘삼각파도’
1987년 동아일보에 실린 커피믹스 광고. 여전히 등산 같은 야외활동에서 마시는 커피임을 강조하고 있다.
커피를 마시려면 뜨거운 물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기업이나 관공서 같은 곳에서 직장인들이 끓인 물을 구할 데는 없었다. 일본말이긴 하지만, 물을 끓일 수 있는 시설이 돼 있는 탕비실(湯沸室)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기업 임원에게 손님이 오면 중역실(重役室)에 딸린 비서실에서 전기 포트로 물을 끓여 잔에 커피를 내놓는 시절이었다. 일반 직원들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커피를 대접하려면 회사 건물 지하나 밖에 있는 다방을 찾아야 했다. 이렇다 보니 커피는 누군가가 타 주는 것이라는 의식이 지배적이었다.
집에서는 가스레인지에 물 끓여 설탕과 프림 양을 조절해 병에 든 커피를 타 먹고, 회사에서는 커피 자판기를 이용하고, 일반인은 다방을 애용했다. 이 같은 ‘삼각파도’ 앞에서 1회용 커피믹스에 대한 관심이 커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커피믹스 매출은 병 커피 매출에 비해 미미했다. 이런 현상은 199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 이 삼각파도의 축이 깨지지 않는다면 커피믹스의 활로는 찾기 어려웠다.
맥심 브랜드를 새롭게 출시하면서 커피믹스 포장도 직사각형 파우치에서 스틱형으로 바뀌었다. 동서식품 제공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기존 맥스웰하우스에 이어 1987년 더 비싼 맥심 브랜드를 출시하면서 고급 커피 이미지라는 마케팅 포인트를 잡았다. 커피 병 모양도 기존 맥스웰하우스 것보다 각을 더 많이 생기게 제작했다. 커피믹스 포장도 직사각형 파우치를 탈피해 막대기(스틱) 형태로 하는 차별화 전략을 택했다. 디자인 조사를 통해 스틱 형태가 더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마케팅팀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1회용 포장은 천편일률적으로 직사각형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시도였다. 나중에는 커피 프리마 설탕 순으로 층층이 담겨 설탕의 양을 조절할 수 있어 건강에도 이롭다는 마케팅까지 펼 수 있었다.
커피와 프리마, 설탕의 배합 비율을 최적화하기 위한 소비자 조사도 진행했다. 가정주부들을 대상으로 실제 가정에서 커피를 탈 때 커피와 프리마, 설탕 비율을 어떻게 하는지 파악하는 것이었다. “커피 한번 타보세요”라고 주문한 다음 커피, 프리마, 설탕이 얼마나 되는지 그 양을 일일이 기록했다. 다방에서도 이와 비슷한 조사를 했다. 그렇게 해서 모인 데이터가 수천 개였다. 이를 토대로 훗날 ‘황금비율’이라고 불리는 맛의 비율을 만들어냈다.
● 도둑처럼 찾아든 냉온수기
사무실에 놓이기 시작한 냉온수기가 커피믹스의 운명을 바꿨다. 출처 크로바 냉온수기
커피믹스를 가로막고 있던 삼각파도의 균열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를 전후해 도둑처럼 찾아들었다. 먼저 뜨거운 물이었다. 커피를 타 마시기 위해 꼭 있어야 하는 뜨거운 물을 구하기가 쉬워졌다. 그 주역은 냉온수기였다. 끓이지 않고도 꼭지만 누르면 뜨거운 물이 나오는 냉온수기의 등장으로 커피를 마시기 위한 필요조건이 해결됐다. 이제 커피믹스만 있으면 끝이었다.
사무실 안에 설치된 냉온수기는 또한 ‘커피는 남이 타 주는 것’이라는 인식도 바꿔 놨다. 뜨거운 물을 받아 커피믹스를 넣고 스스로 저어 마시면 그만이었다. 여성 직원이 사무실 밖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오던 관례가 깨지고 커피는 셀프서비스라는 새로운 문화가 생겼다. IMF 사태 이후 누구든 언제라도 회사를 떠날 수 있다는 위기의식 아래서 다른 직원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일이 부담스러워진 것도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커피 자판기의 쇠퇴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원두커피에 대한 선호가 높아진 데다, 시민들의 환경 의식이 높아져 수돗물에 대한 불신까지 겹쳐 커피 자판기는 서서히 입지를 잃어갔다. 여기에 중소기업 위주이던 냉온정수기 시장에 웅진코웨이나 청호 같은 대기업이 진출하면서 기술은 발전하고 설치 가격은 내려가며 수요가 더 커진 것도 한몫했다.
커피믹스 맛이 좋아졌다는 것을 알게 된 일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자판기 커피 대신 커피믹스를 타 마셔 보니 맛이 있었다. 번거롭게 커피 설탕 프림을 각각 타서 먹지 않아도 맛이 괜찮았다. 커피믹스가 ‘다방 커피’로 불릴 수 있을 만큼 맛을 느낄 수 있게 됐다. 맛이 좋지 않았다면 아무리 타 먹기 편하게 됐어도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IMF 사태 이후부터 시장 규모가 1조2000억 원대 안팎을 기록한 2012, 2013년까지를 ‘커피믹스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커피믹스는 엄청난 성장을 기록했다. 커피믹스가 한국의 커피 소비를 대중화하고 커피 문화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게 된 데에는 냉온수기라는 예상 밖의 조력자 덕이 컸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