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호텔 제주 ‘원생정원’
국내 호텔업계 최초로 국가가 인정하는 ‘민간정원’에 등재된 롯데호텔 제주의 원생정원. 롯데호텔 제주 제공
낮은 돌담 앞에 정원을 소개하는 작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2023 굿디자인 코리아 은상, 2024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본상, 호텔 조경부문으로는 국내 최초로 미국 IDEA 디자인 어워드 2024 본상…. 제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팽나무와 맑은 향기의 치자나무, 그리고 돌담이 정원의 첫인상이었다.
롯데호텔 제주의 ‘원생(原生)정원’이다. 이 정원이 최근 대한민국 산림청 공식 민간정원으로 등록됐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국내 호텔의 사회·문화적 기능이 한 단계 높아진 것을 실감했다. 그동안 호텔들이 주로 미술 작품을 통해 선사해온 예술적 경험이 이제는 종합 공간예술인 정원을 통해 다중 감각으로 확장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산림청 지정 민간정원은 법인·단체 또는 개인이 가꾼 정원을 국민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개방하는 정원으로 전국에 150곳이 운영 중이다. 호텔업계에서는 원생정원이 첫 민간정원이다.
원생정원에서 울창한 수목의 파도 소리와 새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오소록’. 롯데호텔 제주 제공
롯데호텔 제주의 야외 수영장 옆에 자리 잡은 원생정원(3000㎡)은 제주의 곶자왈을 모티브로 했다. 제주 방언으로 숲을 뜻하는 ‘곶’과 가시덤불을 뜻하는 ‘자왈’이 합쳐진 곶자왈은 암석과 가시덤불이 뒤엉켜 이뤄진 원시림으로 미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호텔 측은 제주 고유의 자연과 그 속에 숨겨진 문화·생태적 가치의 근원을 재해석해 조성했다는 뜻에서 정원 이름을 ‘원생’으로 정했다.
이달 초 이 정원을 방문하자 정원 도슨트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안내를 맡은 직원이 말했다. “여기 심어진 나무들은 모두 제주의 숲에서 옮겨온 것들이에요. 곶자왈의 신비로움과 소중함을 전달하기 위해 야생 형태의 다간 교목들을 찾아냈어요. 정원의 낮은 대지부터 높은 상공까지 제주의 지형, 길, 녹음, 초지, 돌, 해안 등 다양한 자연 요소를 집약하고 정제해 공간 미학으로 표현했습니다.”
제주 곶자왈의 신비로운 생태를 옮겨온 원생정원. 제주=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정원에 S자로 길을 내고 굴곡지게 흙을 돋워냈기 때문에 길 따라 걸을 때마다 시야에 펼쳐지는 경관이 바뀌었다. 낮은 오름들을 지나는 느낌도 받았다. 관목들 아래에 심어진 만병초와 고사리, 이끼는 곶자왈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다. 산책로에 있는 수변공간인 ‘미러 폰드(Mirror Pond)’는 낮에는 제주의 하늘과 숲, 밤에는 별을 담아냈다.
원생정원의 수변 공간. 제주=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원생정원은 롯데호텔 제주가 2021년 야외정원 리뉴얼 프로젝트를 가동시키면서 시작됐다. 2000년부터 ‘용가리 화산쇼’를 하던 인공암 시설물이 낡아 보수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가스 화염을 분출하던 장소는 이제 전통 화계(花階·꽃계단)를 떠올리게 하는 친환경 정원으로 바뀌었다. 이곳에서 진행된 다도체험 프로그램에서는 동의보감 약재로 기록됐다는 석창포 차가 나왔다. 새 소리를 들으며 차를 마시니 번잡한 정신이 맑아졌다.
원생정원의 다도체험에 제공되는 석창포 차. 제주=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n
롯데호텔 제주는 정원을 리뉴얼하면서 왜 민간정원 등록을 추진한 걸까. 호텔 측은 설명한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경험 공간으로의 전환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리뉴얼 전에는 일회성 볼거리(화산 분수쇼)로 단순한 즐거움을 제공했다면, 이제는 추상적 경관을 통해 투숙객들이 저마다의 감각과 개인적 서사를 어우러지게 해 특별한 기억을 완성할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했다.”
곶자왈의 생태가 살아있는 원생정원. 제주=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감각이 확장되는 정원
롯데호텔 제주는 심규선 싱어송라이터와 손잡고 방문객들에게 ‘특별한 기억’을 전하고자 했다. 심규선이 원생정원의 낮과 밤에 어울리게 만든 22곡의 음악이 하루 4회 정원에 깔린다.
호텔 측의 설명이다. “정원이 여행자에게 전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경험은 사색하면서 내면을 고요하게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새소리와 물소리도 좋지만 잘 기획된 음악은 정원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는 게 아닐까. 낮에는 잔잔한 치유와 위로의 음악, 밤에는 깊고 묵직한 철학적 사유를 유도하는 음악이 공간을 채운다. 방문객들이 자연과 음악 속에서 새로운 감각적 여정을 떠나기를 바란다.”
원생정원 음악을 만든 심규선 싱어송라이터 . 롯데호텔 제주 제공
프랑스 파리의 유명 부티크 호텔인 ‘호텔 코스테스’가 떠올랐다. 이 호텔 레스토랑과 바에서 트는 라운지 음악이 세계적 인기를 얻으면서 같은 제목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시리즈로 발매됐다. 그동안 주로 미술 분야와 손잡았던 국내 호텔업계에서 롯데호텔 제주의 이번 협업은 청각을 통해 고객 경험을 확장한다는 측면에서 차별되는 시도다.
원생정원의 콘셉트를 제주의 자연으로 정한 후 호텔 측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제주의 돌담이었다. 사계절 지역색을 지닌 경관 요소로 돌담 연구를 시작하다가 인연을 맺게 된 곳이 비영리 사단법인 ‘돌빛나예술학교’였다. 돌담 장인이 교장으로 활동하는 이 단체와 함께 전통기법으로 돌담을 쌓고 돌담 보전과 돌문화 가치 공유 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 이 호텔 로비에서는 돌문화 전시도 열리고 있다. 제주의 돌담이 단순한 경계의 의미를 넘어 제주 사람들의 협동 정신을 상징한다는 설명이다.
호텔에서 열리는 돌문화 전시. 롯데호텔 제주 제공
원생정원 곳곳에는 윤노리나무가 심어 있다. 석공의 연장을 만드는 전통 재료로 사용되는 나무여서 돌담과 어우러지도록 했다. 호텔 측은 “제주 돌문화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데 보탬이 되고자 원생정원의 돌담 및 기획 전시 등 돌 문화를 주제로 한 활동들을 이어오고 있다”며 “앞으로도 정원을 통해 제주만의 근원적 가치를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원생정원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기대를 갖게 한다. 첫째는 정원의 효용을 ‘감각적 여정’으로 지목했다는 점이다. 정원이 단순히 꽃과 나무를 심은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다양한 감각을 누리는 장소로 인식되기를 기대한다. 둘째는 제주 돌담에 대한 접근방식이다. 제주 사람들은 돌담을 가족사이자 마을의 역사이며 섬의 역사로 여긴다고 한다. 국내 첫 ‘호텔 민간정원’이 돌담에 축적된 가치를 존중한 초심을 기억하며 행보를 이어나간다면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호텔에 의미를 더할 것이다.
제주=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