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우 사회부 차장
“고 부장 40만 원, 조 대리 90만 원….”
싱글맘 박정미(가명·35) 씨가 남긴 8장짜리 유서에 빼곡히 적힌 채무 기록들. 처음 빌린 돈은 고작 40만 원이었다. 재개발로 철거를 앞둔 서울 성북구 ‘미아리텍사스’에서 일하던 그는 뇌졸중을 앓고 있는 70대 아버지를 대신해 유치원생 딸을 돌봐주던 육아도우미에게 줄 돈을 융통할 길이 없어 불법 사채에 손을 댔다.
동아줄인 줄 알았지만 끝내 숨통을 죄어 오는 올가미였다. 순식간에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기한 내 원리금을 상환하지 못하자 ‘1분에 10만 원’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이자가 붙었고, 그때부터 악랄한 추심이 시작됐다. 박 씨의 지인은 물론이고 딸의 유치원 교사에게까지 ‘몸을 판다’는 내용의 문자를 수백 통씩 보냈다. 그 후 보름도 채 되지 않아 박 씨는 “다음 생에서도 사랑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딸에게 남기고 홀로 세상을 떠났다.
수년째 사후약방문 데자뷔를 보는 느낌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불법 사금융 민생현장 간담회에서도 “약자의 피를 빠는 악질적 범죄”라며 분노했다. 앞서 정부는 2022년 8월 불법 사채업자의 빚 독촉을 견디지 못해 함께 목숨을 끊은 ‘수원 세 모녀 사건’을 계기로 사회적 공분이 일자 ‘불법 사금융 척결 범정부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킨 바 있다.
정부의 거듭된 엄포에도 효과는 신통치 않다. 금융감독원이 접수한 불법 사금융 관련 피해 상담·신고 건수는 2021년 9918건에서 2022년 1만913건, 지난해 1만3751건으로 늘었다. 올해 들어서도 10월까지 1만2398건이 접수돼 증가세가 이어지고 있다.
취약계층은 계속 불법 사금융으로 밀려나고 있다. 서민금융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대부업체에서 불법 사금융으로 떠밀린 저신용자만 최대 9만1000명으로 추산된다. 제도권 최후의 창구인 대부업체가 사실상 대출문을 닫아 버렸기 때문이다. 법정 최고금리가 2021년 7월부터 20%로 묶인 상황에서 고금리 장기화로 조달 금리가 높아지고, 연체율은 치솟아 사업성이 크게 악화된 탓이다. 대부업체 신용대출 잔액은 2022년 7월 10조3786억 원에서 올해 9월 8조594억 원으로 22.3% 급감했다. 같은 기간 신규 신용대출을 내주는 대부업체도 64곳에서 37곳으로 쪼그라들었다.
저신용자에게 최대 100만 원 한도로 돈을 빌려주는 ‘소액생계비 대출’에 대한 홍보와 지원을 대폭 확대해 사회 안전망을 확보해야 한다. 지난해 3월 출시된 이후 소액생계비 대출자는 급증하고 있다. 연체율도 8월 말 기준 26.9%로 지난해 말(11.7%) 대비 2배 이상으로 높아졌다. 금융당국이 대출 이용 횟수 제한을 없애면서 대출 수요가 더 커질 것으로 전망돼 국회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 추가 재원 마련 방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 서민들의 급전 창구라는 취지에 맞게 현재 상담 예약 후 5일가량 걸리는 대기 시간도 가능한 한 축소해야 한다.
박민우 사회부 차장 min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