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정일천 가톨릭관동대 초빙교수·전 국정원 국장
그는 독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한 독일의 소련 침공 계획인 바르바로사(Barbarossa) 작전 개시일을 입수해 보고했지만 스탈린으로부터 독일 이중 스파이로 의심받기도 했다. 하지만 소련은 일본의 남방 진출 계획과 이를 뒷받침하는 여름용 군복 제작 동향 등 그가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일본의 침공을 우려해 극동지역에 배치했던 군대를 독일 방어에 돌림으로써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고 이는 2차대전 전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조르게는 스파이가 수집한 한 줄의 첩보가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고 역사까지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 휴민트의 전설이다. 이 위대한 스파이를 배출한 러시아가 지금 우크라이나와 장기간 전쟁 중이다. 그런데 이 전쟁이 김정은의 용병팔이로 남의 나라 전쟁이 아니라 우리에게 심각한 안보 위협이 되면서 정부 대응과 정보기관의 정보력이 시험대에 올랐다. 러시아는 대한민국 스파이들의 대북 휴민트 활동에 있어 중국 다음으로 비중이 큰 국가다. 그러나 ‘스파이들의 무덤’으로 불릴 만큼 방첩 활동이 강력해 외교관 신분인 백색요원들의 정보 활동이 쉽지 않다. 과거 북한 요원에 의한 최덕근 영사 피살과 조성우 참사 추방 사건 등은 러시아에서의 스파이 활동 환경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래서 비노출 공작 부서의 휴민트 자산과 장기간 현지에 구축한 블랙요원을 활용한 정보 활동에 크게 의존해야 하는 지역이다.
이제 국정원은 북한의 도박을 완전한 실패로 종결짓기 위한 정보 수집은 물론 심리전 등 다양한 공작 실행으로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할 때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처럼 북한의 참전이 휴민트를 포함한 대북정보 역량 강화를 위한 촉매제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 현지 정보 수집 활동을 위한 대표단 파견 문제 등을 두고 논쟁 중인 정치권도 트럼프의 귀환 등으로 안보 불확실성이 커진 지금 우리 내부에서만큼은 한목소리가 나오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안보 문제에 정파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한 대한민국에서 조르게 같은 위대한 스파이는 만들어질 수 없다.
지금 지구 다른 한쪽에서는 이란 주도의 이른바 ‘저항의 축’ 세력들과 전쟁 중인 이스라엘이 놀라운 정보력과 비밀 공작 능력으로 세계를 감탄시키고 있다. 적과 대치 중인 안보 환경이 닮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 첩보 드라마에서 이스라엘 모사드 요원이 스파이 활동의 의미에 대해 한 말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요즘이다. ‘정보는 생명을 구한다’.
정일천 가톨릭관동대 초빙교수·전 국정원 국장